關.東.動.亂. - 호죠 소운의 칸토 제패전 - 1. 이즈 점령 도칸이 주군에게 암살된 후, 칸토는 다시 兩우에스기가의 대립이라고 하는 쟁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즈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호리고에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사망하게 되어, 적자 茶々丸(차차마루)가 2대 호리고에 쿠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차차마루는 터무니 없는 폭군이었기 때문에 가신의 신망을 잃고 있었다. 칸토의 兩우에스기가가 쟁란으로 움직일 수 없는 틈을 노려, 소운은 호리고에 쿠보를 급습하여 이즈 1국을 정복해 버렸다. 소운의 정치가 前호리고에 쿠보보다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민중들도 소운의 이즈 통치를 환영하였다. 이제 이즈는 소운의 칸토 제패 야망의 강력한 교두보가 되었다. 2. 오다와라성 탈취 「쵸쿄연중..
關.東.動.亂. - 쵸쿄연중의 대란(長享年中の大亂) - 1. 쵸쿄의 대란 오오타 도칸을 토벌하기 위해 손을 잡은 兩우에스기가였지만, 도칸을 암살한 것으로 인하여 우에스기 사다마사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호기라고 본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는 오기가야츠-우에스기를 괴멸시키기 위한 군사를 일으켜, 칸토 全국토의 호족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해 오기가야츠-우에스기는 코가 쿠보, 나가오 카게하루, 호죠 소운 등과 손을 잡아 응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쵸쿄연중의 대란(長享年中の大亂)」이다. 「사네마키하라 전투(實蒔原の合戰)」, 「스가하라 전투(須賀原の合戰)」, 「타카미하라 전투(高見原の合戰)」등의 3회에 걸친 대회전에서, 숫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기가야츠-우에스기方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2. ..
關.東.動.亂. - 오오타 도칸 암살 사건 - 1. 도비합체 후의 칸토 나가오 카게하루&아시카가 시게우지의 막부와의 화목으로 칸토에는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평화의 최대 공로자는 당연히 오오타 도칸이었다. 도칸의 명성은 이제 우에스기가와 칸토의 수호신으로서 칸토 전역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호리고에 쿠보, 山内上杉顕正(야마노우치-우에스기 아키마사), 扇谷上杉定正(오기가야츠-우에스기 사다마사)의 3者는 이러한 도칸의 명성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시기에 막부는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정식 칸토 쿠보로 임명하게 된다. 한편, 호리고에 쿠보는 칸토 쿠보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대신에 이즈 1국을 하사받았음에도, 이러한 인사조치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도칸의 주군 사..
關.東.動.亂. - 카게하루의 난(景春の亂) - 1. 난의 원인 1473년에 나가오 카게노부가 사망하게 되었는데, 칸레이 上杉顕定(우에스기 아키사다)는 카게노부의 아우 忠景(타다카게)에게 칸레이직을 잇게 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적자 나가오 카게하루는 아키사다에게 반기를 들었고, 鉢形城(하치가타성)에서 농성하였다. 카게하루는 주가와 항쟁을 거듭하고 있던 코가 쿠보와 결탁하여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2. 이카코 전투 1476년, 호리고에 쿠보의 명을 받아 오오타 도칸이 300騎를 따르게 하여 이마가와가에 조정역으로 파견되었다. 마치 도칸의 부재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게하루는 코가 쿠보와 대치하고 있던 兩우에스기의 당주가 주둔하고 있는 이카코의 진을 공격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재차 이카코의 진을 ..
關.東.動.亂. 1. 쿄토쿠의 대란 ●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거병 코가 쿠보라 불린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와 대립하여 멸망당한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유아였으며, 소멸된 칸토 쿠보의 제도는 막부에 의해 부활된 것이었다.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형을 위해 충의를 다하다가 막부에 토벌당한 유우키씨의 처우를 둘러싸고, 칸토 쿠보 시게우지와 칸토 칸레이 上杉憲忠(우에스기 노리타다)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454년, 마침내 양자는 결렬하여 시게우지가 거병하게 되었다. 結城(유우키), 武田(다케다), 里見(사토미), 印東(인토우) 등 시게우지의 막하에 모인 3000騎가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다시, 무로마치 막부VS코가 쿠보의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른바「쿄토쿠의 대란(享德の大亂)」이다. ..
關.東.動.亂. 1. 무로마치 쇼군과 칸토 쿠보 칸토 동란의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면, 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室町幕府(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 무가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그러나, 무사에게 있어서 칸토의 鎌倉(가마쿠라)는 특별한 장소였으며, 칸토의 무사를 통솔하기 위해서는 가마쿠라에도 막부의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 鎌倉府(가마쿠라후)였는데, 이곳의 수장을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 또는 칸토 쿠보(關東公方)라 불렀다.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장남 義彰(요시아키)의 자손이 교토의 쇼군직을, 차남 基次(모토쯔구)의 자손이 칸토 쿠보직을 대대로 잇는 세습제를 취하였다. 칸토 쿠보에게는 같은 다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