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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인물관련

칸토동란(關東動亂) part6 : 호죠 소운의 칸토 제패전

關.東.動.亂.

- 호죠 소운의 칸토 제패전 -




1. 이즈 점령


도칸이 주군에게 암살된 후, 칸토는 다시 兩우에스기가의 대립이라고 하는 쟁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즈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호리고에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사망하게 되어, 적자 茶々丸(차차마루)가 2대 호리고에 쿠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차차마루는 터무니 없는 폭군이었기 때문에 가신의 신망을 잃고 있었다. 칸토의 兩우에스기가가 쟁란으로 움직일 수 없는 틈을 노려, 소운은 호리고에 쿠보를 급습하여 이즈 1국을 정복해 버렸다.

 

소운의 정치가 前호리고에 쿠보보다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민중들도 소운의 이즈 통치를 환영하였다. 이제 이즈는 소운의 칸토 제패 야망의 강력한 교두보가 되었다.




2. 오다와라성 탈취


「쵸쿄연중의 대란」에서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호죠 소운과 손을 잡고,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타카미하라의 전투에서 호죠 소운은 오기가야츠-우에스기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사다마사가 아라카와 하반을 횡단하던 중에 낙마 사고로 사망하여 오기가야츠-우에스기軍이 패주하고 난 뒤에, 소운의 칸토 제패의 야망은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의 세력권을 강탈하는 계획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사가미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단 오다와라성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의 오다와라 성주 大森氏頼(오오모리 우지요리)는「扇谷上杉三將」이라고 불리는 명군주였으며, 오오타 도칸의 사후에 가중(家中)의 중심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과연, 이런 인물이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소운도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지요리가 사망함으로써 기회가 도래하였다. 우선, 소운은 오다와라성의 새로운 성주 大森藤頼(오오모리 후지요리)에게 편지나 진상품 등의 선물을 보내어 친교를 두텁게 하였다.


후지요리의 마음이 녹아내렸을 무렵을 가늠하여, 소운은


「이즈에서 鹿狩(시카가리: 사슴 사냥)를 하고 있었는데, 사슴이 하코네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몰이꾼을 그 쪽으로 보내어 사슴을 이즈에 되돌려 보내도 괜찮을까요?」


라는 신청을 하게 된다. 제법 소운에게 마음을 허락한 후지요리는 시원스럽게 허가를 내주게 된다.

 

소운은 몰이꾼 모습의 정예 100騎를 하코네산과 이시가키산에 잠복시켰는데, 밤이 되자 소의 뿔에 관솔불을 붙이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수만의 대군으로 보이게 하는 책략을 꾸며 오다와라성을 기습하였다.


이제, 소운의 수중에 들어온 오다와라성은 사가미 공략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3. 곤겐산의 전투


소운이 오다와라성을 탈취한 뒤에야, 兩우에스기가는 소운의 존재와 함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兩우에스기가는 일족끼리 다투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소운에게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소운은 득의만만한 계략을 통하여 오기가야츠-우에스기가의 가신 上田政盛(우에다 마사모리)의 배반을 이끌어 내었으며, 사가미의 権現山城(곤겐야마성)을 자신의 지배하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兩우에스기세에 의해 곤겐야마성은 낙성하였고, 소운은 심각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른바「곤겐산의 전투(権現山の合戰)」이다.




4. 미우라 반도의 제압


兩우에스기가에 패배한 소운이었지만, 우선은 西사가미를 지배하에 두기 위해 「扇谷上杉三將」의 1인으로 꼽히는 三浦義同(미우라 요시아츠)를 다음 목표로 정하였다.

 

소운은 岡崎城(오카자키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고, 그토록 염원하던 가마쿠라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미우라 일족은 新井城(아라이성)으로 도망쳤는데, 가마쿠라에서는 군사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아라이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소운은 가마쿠라의 부근에 玉繩城(타마나와성)을 축성하였다.

 

결국, 소운은 사가미 최대의 호족이었던 미우라 일족을 멸하여, 사가미국을 평정하였다.




● 출처 : http://www11.ocn.ne.jp/~baronh/rekisi/doukan/souunra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