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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動.亂.

 - 카게하루의 난(景春の亂) -




1. 난의 원인


1473년에 나가오 카게노부가 사망하게 되었는데, 칸레이 上杉顕定(우에스기 아키사다)는 카게노부의 아우 忠景(타다카게)에게 칸레이직을 잇게 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적자 나가오 카게하루는 아키사다에게 반기를 들었고, 鉢形城(하치가타성)에서 농성하였다. 카게하루는 주가와 항쟁을 거듭하고 있던 코가 쿠보와 결탁하여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2. 이카코 전투 


1476년, 호리고에 쿠보의 명을 받아 오오타 도칸이 300騎를 따르게 하여 이마가와가에 조정역으로 파견되었다.


마치 도칸의 부재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게하루는 코가 쿠보와 대치하고 있던 兩우에스기의 당주가 주둔하고 있는 이카코의 진을 공격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재차 이카코의 진을 급습하였다. 兩우에스기군은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고즈케로 퇴각하였다.


우에스기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칸토 각지의 호족들이 카게하루에게 호응하기 시작하였고, 카게하루 일당은 일대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3. 호족 토시마씨의 참전 


오오타 도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칸토의 세력판도는 크게 일변하기 시작하였다.


카게하루에게 호응한 무사시의 호족 豊島氏(토시마씨), 金子氏(카네코씨), 越後氏(에치고씨) 등이 兩우에스기가의 주변을 둘러싼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설상가상으로, 北칸토에서는 코가 쿠보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1477년, 칸토로 복귀한 도칸은 에도성과 카와고에성의 연락을 방해하고 있던 溝呂木城(미조로기성)과 小磯城(코이소성)을 우선적으로 공략하였다. 또한, 카게하루方의 최대의 호족인 토시마씨와 「에코타·누마부쿠로의 전투(江古田·沼袋の合戰)」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토시마씨를 물리친 도칸은 토시마씨의 거성 石神井城(샤쿠지이성)과 練馬城(네리마성)을 차례차례로 함락시켰다. 패주하던 토시마씨는 카게하루方인 矢野兵庫助(야노 효고노스케)가 있는 小机城(코즈쿠에성)으로 도망쳤지만, 1478년에 이 성도 함락되어 토시마씨의 세력은 무사시에서 일소되었다.




4. 요우도하라 전투


차례차례로 아군이 격파당하는 것에 초조해진 나가오 카게하루는 「이카코의 진」을 탈환한 우에스기세를 맞아 싸우기 위해 출진하였다.


우에스기세는 5월 13일에 이카코에 진을 쳤고, 14일 새벽에 오오타 도칸의 인솔하에 하치가타성을 향하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나가오 카게하루는 이러한 우에스기세의 진로를 막기 위해, 요우도하라의 針ヶ谷(하리가야)로 군세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도칸의 양동 작전이었다. 카게하루軍의 움직임을 지켜 본 兩우에스기세·나가오 타다가게세·오오타세는 단번에 카게하루軍을 노리며 돌격하였다. 완전히 의표를 찔린 카게하루軍은 長野爲兼(나가노 타메카네)가 전사하는 등, 다수의 사망자를 내며 패주하여 하치가타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요우도하라의 전투(用土原の合戰)」는 「카게하루의 난」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고 전한다.




5. 아라마키 전투


그 해 7월에 나가오 키게하루의 요청에 응하여, 그동안 수수방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던 코가 쿠보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원군으로 那須(나스), 佐々木(사사키), 柳田(야나기다), 一色(잇시키)의 여러 무장들을 보내어 군마군의 瀧(타키)에 포진시키게 된다.


이 타키라는 곳은 하치가타성과 우에스기軍이 주둔하고 있는 児玉(코다마)의 진의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우에스기軍을 공격하기에도, 카게하루에게 원군을 보내기에도 최적인 장소였다.


코가 쿠보는 우에스기軍의 병참 기지가 白井城(시라이성)에 있다고 추측하여, 코다마의 진과 시라이성 간의 연락을 차단하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에, 오오타 도칸은 우에스기軍의 주력을 시라이성으로 되돌렸고, 스스로는 荒巻(아라마키)에 포진하였다. 도칸이 여기에 포진한 것은 코가 쿠보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카게하루는 에치고의 동족인 長尾爲景(나가오 타메카게: 겐신의 부친)에게도 원군을 요청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몇차례의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도 승부는 판가름나지 않았다.




6. 시오카라하라 전투



아라마키에 진을 치고 있는 오오타 도칸과 자웅을 겨루기 위해 나가오 카게하루는 유우키, 나스, 사사키, 横瀬(요코제) 등을 인솔하여 아라마키로의 진군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도칸은 결전을 피하여 塩売原(시오카라하라)로 진을 이동하였다. 시오카라하라는 강과 바위 투성이인 험준한 땅으로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장소였다.


카게하루도 이 시오카라하라에 포진하였고, 양측은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치며 교착 상태를 지속하였다. 11월에 접어들게 되자, 주변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瀧(타키)에 포진하고 있던 코가 쿠보는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가 농성하고 있는 시라이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廣馬場(히로바바)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사기가 저하된 카게하루는 군사를 물려 하치가타성으로 퇴각해 버렸다.


이러한 카게하루軍의 움직임을 알게 된 도칸은 시라이성의 兩우에스기세와 남북에서 코가 쿠보를 협격하였다. 결국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코가 쿠보는 우에스기軍에 화목을 요청하게 된다.




7. 난의 종결 


코가 쿠보가 군을 물린 것으로, 나가오 카게하루는 더욱 고립되었다. 이것을 승기로 여긴 오오타 도칸은 하치가타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비록 저항은 했지만, 도칸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오 카게하루는 하치가타성을 방기하여 秩父(치치부)로 물러났다.


그 후, 토시마씨의 잔당이 平塚城(히라츠카성)에서 거병하였고, 오오타 도칸은 다시 사가미를 전전하게 된다. 그 틈을 탄 나가오 카게하루는 하치가타성을 탈환하여, 다시 저항을 시작하였다.


게다가 화목했다고 여겨지던 코가 쿠보가 뒤에서 조종하여 보소우 반도의 千葉孝胤(치바 요시타네)가 나가오 카게하루에게 호응하였다. 오오타 도칸은 사가미, 보소우 지방의 진압에 병력을 투입하였다.


하치가타성은 몇번이나 나가오 카게하루의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에 의해, 탈환과 낙성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던 1480년,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나가오 카게하루는 무로마치 막부에 兩우에스기가와의 화목에 대한 조정을 신청하였다.


막부도 명을 내려 兩우에스기가와 코가 쿠보의 대립, 카게하루의 반란은「화목」이라는 형태로 종결하게 되었다. 이것을「도비합체(都鄙合體)」라고 부른다.




● 출처 : http://www11.ocn.ne.jp/~baronh/rekisi/doukan/kageharura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