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東.動.亂.
1. 쿄토쿠의 대란
●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거병
코가 쿠보라 불린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와 대립하여 멸망당한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유아였으며, 소멸된 칸토 쿠보의 제도는 막부에 의해 부활된 것이었다.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형을 위해 충의를 다하다가 막부에 토벌당한 유우키씨의 처우를 둘러싸고, 칸토 쿠보 시게우지와 칸토 칸레이 上杉憲忠(우에스기 노리타다)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454년, 마침내 양자는 결렬하여 시게우지가 거병하게 되었다. 結城(유우키), 武田(다케다), 里見(사토미), 印東(인토우) 등 시게우지의 막하에 모인 3000騎가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다시, 무로마치 막부VS코가 쿠보의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른바「쿄토쿠의 대란(享德の大亂)」이다.
이듬해, 시게우지는 「유우키 전투」이래로 칸토 칸레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칸토 각지의 고쿠슈를 장악하였고, 막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직접적인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칸토 칸레이가 살해된 우에스기가는 우에스기 3가(야마노우치, 오기가야츠, 이누카케)가 각각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게우지의 거병에 대한 대응이 늦어지고 있었다.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만이 유일하게 島河原(시마카와하라)까지 진군했지만, 시게우지측의 명장 武田信長(다케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당하여 糟屋(카스야)까지 패주하게 되었다.
그 후, 막부는 새로운 칸토 칸레이로 上杉房顕(우에스기 후사아키)를 임명하여, 시게우지 토벌의 군세를 정돈하게 된다. 하지만, 시게우지方의 세력이 증대되는 것을 초조해 하던 우에스기方은 총대장인 칸토 칸레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급거 우에스기군 20000騎를 多摩川(타마가와)·立河原(타치카와하라)에 집결시키게 된다.
총대장이 부재인 채로 시게우지方과 대치한 우에스기 연합군은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교묘한 지휘에 의해 각개격파당하여 대패전을 기록하게 된다.
이「부바이가와라의 전투(分倍河原の合戰)」의 승리에 의해,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칸토에서의 세력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게우지는 군대를 칸토 각지에 분산시키는 잘못을 저질러 일시적으로 소멸하고 있던 우에스기가가 세력을 만회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 오오타 도칸의 등장
부바이가와라의 전투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이 당주 顕房(아키후사)가 전사했던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였는데, 그 적자 政實(마사자네)는 아직 4세에 불과하였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太田道眞(오오타 도신)에게 가독을 상속하여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의 家宰(카사이)가 된 오오타 도칸이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와 칸토 칸레이의 구세주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정식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오오타 도칸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급여를 지급받고 종군했던 足輕(아시가루)라 불리는 용병 부대를 병사로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된다.
통상의 자국에서의 동원만으로는 시게우지方의 병력에 뒤떨어지는 것을 만회하기 위한 새로운 발상이었다. 도칸은 이 방법으로 모인 병력을 인솔하여 시게우지方인 江戶氏(에도씨)의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 에도씨 공략의 성공으로 도칸은 무사시의 동남부, 시모우사 남서부에 우에스기方의 세력을 만회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南칸토에서의 오오타 도칸의 활약에 의해, 시게우지가 구상하고 있었던 房総半島(보소우 반도)의 치바씨 내분을 이용하여 북쪽의 다케다 노부나가, 남쪽의 사토미씨의 협공을 통한 보소우 제패는 물거품이 되었다.
거의 칸토 전지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아시카가 시게우지였지만, 이 도칸의 활약으로 우에스기方은 서서히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455년 9월, 막부는 시게우지 토벌의 교지를 내렸고, 치바씨의 내분의 결과로 시게우지方이 된 치바씨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도칸은 치바씨 공략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후로 우에스기方의 공세에 의해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게 되어 시게우지方의 역공을 당하게 된다. 1456년에 시게우지는 고즈케와 코가 주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에 대해 도칸은 시게우지의 이목이 무사시 북동부에 쏠려 있는 것을 역이용하여, 무사시 남부와 보소우 반도 등의 시게우지方의 허술한 곳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도칸은 足立郡(아다치군)·葛飾郡(카츠시카군)에 그 세력권을 확립하게 된다.
도칸은 한발 더 나아가 시게우지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에도성, 이와츠키성, 카와고에성을 축성하였다.
● 이카코의 대진
막부는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새로운 칸토 쿠보로 임명하였다. 이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입성치 못한 채로 호리고에에 머물며 호리고에 쿠보라 불렸다. 한편, 칸토 북부와 코가를 거점으로 하는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코가 쿠보라 불렸다.
이제 칸토는 막부측 호리고에 쿠보의 후광을 등에 업은 우에스기가와 코가 쿠보의 대결이라는 도식이 확립하게 되었다.
1459년, 우에스기 후사아키의 지휘로 호리고에 쿠보方의 코가 쿠보 공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양자 모두 피해를 입은 채, 利根川(토네가와)의 五十子(이카코)에서 대치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후, 도칸이 주도한 소규모의 전투에서 호리고에 쿠보의 작은 승리가 있었지만, 교착 상태는 지속되게 된다.
1468년, 막부에서 파견하는 칸토의 원군은 교토에서 발발한「오닌의 난」의 영향으로 중단되었고, 코가 쿠보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1471년에 시게우지는 대군을 인솔하여 하코네로 진군하였고, 이즈의 三島(미시마)에 난입하였다. 이 군사 행동은 일시 호리고에 쿠보方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오오타 도칸이 육성한 부대가 코가 쿠보의 주력을 완파하여 시게우지의 대패로 끝나게 된다.
이 기회를 틈타 호리고에 쿠보方은 단번에 코가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시게우지는 보소우의 치바씨를 의지하여 재기를 꾀하게 된다. 이듬해에 시게우지는 코가성을 탈환하여, 다시 전황은「이카코의 대진(五十子の対陣)」이라고 하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2. 스루가의 상속자 분쟁
1476년, 스루가 슈고인 今川義忠(이마가와 요시타다)가 사망하게 되어 상속자를 둘러싼 분쟁이 발발하고 있었다. 적자 龍王丸(류오마루)는 아직 6세에 불과하여, 어린 군주로는 이 전란의 세상을 감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무리들이 요시타다의 사촌형제인 小鹿範満(코지카 노리미츠)를 옹립하였다.
류오마루파와 노리미츠파에 의한 상속자 분쟁의 격류 속에서 스루가를 지배하에 두기 위한 목적으로 호리고에 쿠보는 오오타 도칸을 조정역으로서 스루가에 파견하게 된다. 도칸은 300騎를 인솔하여 스루가에 입성하였다.
외부의 간섭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었던 양측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운을 알아차린 요시타다의 처남 호죠 소운은 오오타 도칸의 진영에 방문하여 회견을 실시했다. 이 회견에서 호죠 소운은,
「스루가에서의 소란은 막부에 딴마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마가와 가중(家中)의 분쟁이기 때문에 화해시킬 때까지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만약 듣지 않는 경우에는, 진압해도 좋다.」
라고 요청하였다. 오오타 도칸과 호죠 소운은 이 단 한차례의 회견을 통하여 서로의 자질을 인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오타 도칸은 호죠 소운의 요청에 따라 군세를 철퇴하기로 했다.
호죠 소운은 이마가와가의 상속자 문제를 보기좋게 매듭지었고, 이를 통하여 이마가와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칸토를 제패하게 되는 호죠 소운이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3. 나가오가의 소동
1473년,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家宰(카사이) 長尾景信(나가오 카게노부)가 사망하여, 그 아들 長尾景春(나가오 카게하루)가 카사이를 계승하지 않고, 숙부인 長尾忠信(나가오 타다노부)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 인사가 이후의 칸토 정국을 동란에 말려들게 하는「카게하루의 난(景春の亂)」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카사이직은 나가오 3가, 즉 惣社(소우자), 白井(시라이), 足利(아시카가)가 무사시 슈고직 등의 요직을 교대제로 계승해 왔다. 이 방식으로 3가는 세력 관계를 균등하게 유지하였다.
그랬던 것이 「쿄토쿠의 대란」의 영향을 받아 인사가 정체되어, 시라이-나가오씨가 2대를 계속하여 카사이직을 계승해 버리게 된다.
당주 顕家(아키이에)는 시라이-나가오가의 3대인 나가오 카게하루에게 카사이직을 계승시키게 되면, 지금까지 균형을 유지해온 3가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될 것을 염려하였고, 결국 소우자-나가오가의 나가오 타다노부가 무사시 슈고를 계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사이직도 겸임시켜 버렸다.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이 오오타 도칸이었다. 카사이와 무사시 슈고의 어느 쪽도 계승할 수 없게 된 나가오 카게하루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무사시 슈고직을 카게하루에게 계승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원래 도칸은 11세 연하인 나가오 카게하루의 지략과 전략을 일찍부터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재능을 우에스기가를 위해 발휘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키이에는 이 제안을 통해 오오타 도칸의 명성이 오르는 것을 저어하여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扇谷上杉定正(오기가야츠-우에스기 사다마사)의 입장에서도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카사이직을 지략이 뛰어난 나가오 카게하루가 잇게 되어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세력이 증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교환 조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오타 도칸은 카게하루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와 가게하루의 사이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녔지만, 양자의 골은 더욱 더 깊어질 뿐이었다.
그러한 긴박한 정세의 와중인 1476년에 오오타 도칸은 칸토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명을 받아 이마가와가의 조정역으로 떠나게 되었다.
칸토에서는 오오타 도칸이 부재중! 한 명의 영웅이 송곳니를 감추고 호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長尾景春(나가오 카게하루).......
● 출처 : http://www11.ocn.ne.jp/%7Ebaronh/rekisi/doukan/3eiyu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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