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東.動.亂.
1. 무로마치 쇼군과 칸토 쿠보
칸토 동란의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면, 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室町幕府(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 무가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그러나, 무사에게 있어서 칸토의 鎌倉(가마쿠라)는 특별한 장소였으며, 칸토의 무사를 통솔하기 위해서는 가마쿠라에도 막부의 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 鎌倉府(가마쿠라후)였는데, 이곳의 수장을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 또는 칸토 쿠보(關東公方)라 불렀다.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장남 義彰(요시아키)의 자손이 교토의 쇼군직을, 차남 基次(모토쯔구)의 자손이 칸토 쿠보직을 대대로 잇는 세습제를 취하였다.
칸토 쿠보에게는 같은 다카우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쇼군이 될 수 없다는 불만이 다소나마 있었다고 생각된다.
무로마치 3대 쇼군 義滿(요시미쓰)의 시대와 4대 쇼군 義持(요시모치)의 시대에 양자는 2번에 걸친 충돌의 위기가 있었지만, 6대 쇼군 義敎(요시노리)의 시대까지는 어떻게든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우에스기 4가의 대립
교토의 쇼군을 보좌하는 管領(칸레이)라는 No.2의 요직이 있었는데, 칸토 쿠보에게도 칸토 칸레이라는 No.2의 요직이 있었다.
이 요직에는 우에스기 4가, 즉 犬懸(이누카케), 山內(야마노우치), 扇谷(오기가야츠), 宅間(타쿠마)가 차례로 교대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4대째 칸토 쿠보 持氏(모치우지)의 시대에 우에스기 4가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이누카케-우에스기씨가 칸토 칸레이의 자리를 차지하여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아직 젊었던 모치우지는 대항 세력이었던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와 결탁하여 이누카케-우에스키씨를 칸토 칸레이에서 축출하였다.
이에 격노한 前칸토 칸레이 上杉禪秀(우에스기 젠슈)는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가마쿠라를 점거하였다. 이것이 1416년에 있었던 이른바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다.
칸토의 이변에 놀란 막부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우에스기 젠슈를 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가 우에스기가에서 최대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기가야츠-우에스기씨도 점차 세력을 신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우에스기가의 항쟁이 이후의 칸토 정국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3. 에이쿄의 난
칸토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요인이 되었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4대 쇼군 요시모치가 5대 쇼군에게 쇼군직을 양보한 지 얼마되지 않아 5대가 곧바로 병사해 버리게 된다. 6대째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4대 쇼군 요시모치도 사망했기 때문에, 요시모치의 형제 중에서 제비뽑기로 쇼군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선출된 인물이 폭군으로 유명한 6대 쇼군 요시노리였다.
칸토 쿠보 모치우지는 이러한 처사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의 입장은 아시카가 일문인 칸토 쿠보도 쇼군이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칸토 쿠보는 명명백백하게 무로마치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로 나왔다.
여기에다가 폭군으로 알려진 쇼군 요시노리가 수많은 사건을 일으켜, 무로마치 막부와 칸토 쿠보의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한 모치우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1435년에 있었던 이른바「에이쿄의 난(永享の亂)」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싸움도 벌이지 못한 채로 막부군이 승리하여 칸토 쿠보는 4대로 멸망하게 되었다.
4. 유우키 전투
이 모치우지의 유아 春王丸(하루오마루)와 安王丸(야스오마루)는 가신에게 모셔져 간신히 下野(시모쯔케)로 도망쳤다. 시모쯔케의 호족 結城氏朝(유우키 우지토모)를 의지한 도망이었다.
유우키 우지토모는 「에이쿄의 난」에서 별 피해가 없었던 반란군을 정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1440년에 있었던 이른바「유우키 전투(結城合戰)」이다.
1년간의 공방 끝에 이 또한 막부가 승리하였다. 이후, 칸토의 패권은 칸토 칸레이 우에스기가로 옮겨가게 된다.
5. 코가 쿠보와 호리고에 쿠보
당분간 우에스기가에 의한 칸토 지배가 계속되었지만, 지방 호족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칸토의 무사를 통솔하려면, 겐지의 혈통인 「아시카가」라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막부는 교토에서 양육하고 있었던 모치우지의 유아 永寿丸(에이주마루)를 新칸토 쿠보로서 가마쿠라로 파견하였다. 이른바, 칸토 쿠보 足利成氏(아시카가 시게우지)의 탄생이다.
그러나, 수년 후에 시게우지는 자신의 아버지와 2명의 형을 죽인 원흉이 무로마치 막부와 우에스기가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막부 및 우에스기가와 대립하게 된다.
결국, 시게우지는 古河城(코가성)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른바, 코가 쿠보의 탄생이다.
코가 쿠보는 금새 北칸토의 호족을 따르게 하여 일대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사태로 인하여 막부는 새로운 칸토 쿠보 足利政知(아시카가 마사토모)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칸토에서는 우에스기가의 세력이 강성하였기 때문에 마사토모는 가마쿠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사토모는 堀越御所(호리고에 고쇼)에 자리잡게 되어, 호리고에 쿠보로 불리게 되었다.
명목상, 칸토의 주인은 막부의 공인을 받은 마사토모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코가 쿠보와 칸토 칸레이 우에스기씨가 잡고 있는 복잡한 양상이었다.
이와 같이 칸토는,
● 2개의 칸토 쿠보(코가 쿠보 VS 호리고에 쿠보)의 세력 다툼
● 호리고에 쿠보의 가신인 칸토 칸레이 우에스기가가 칸토의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
● 우에스기가 내부의 분쟁(야마노우치-우에스기 VS 오기가야츠-우에스기)
● 그 외, 중소 호족의 兩진영으로의 배반
위와 같은 수많은 요인들이 뒤섞인 복잡한 상황 속에 있었다. 그러한 혼탁한 시대 속에서 두 명의 영웅이 이 세상에 빛을 보았다.
그 이름은,
「太田道灌(오오타 도칸)」과 「北條早雲(호죠 소운)」.................
● 출처 : http://www11.ocn.ne.jp/~baronh/rekisi/doukan/jida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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