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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

category 일본 전국시대 인물관련 2010. 7. 21. 18:24

다케다 신겐(일본어: 武田信玄 (たけだ しんげん) 무전신현[*]) 또는 다케다 하루노부(일본어: 武田晴信 (たけだ はるのぶ) 무전청신[*], 1521년 12월 1일 ~ 1573년 5월 13일)는 센고쿠 시대 무장겸 다이묘(大名). 가이노쿠니(甲斐国; 현 야마나시 현(山梨県))의 슈고(守護)이다.

법명은 신겐(일본어: 信玄 (しんげん))이고 본명은 하루노부(일본어: 晴信 (はるのぶ))이다. 관위는 종4위하(從四位下). 대선대부(大膳大夫)로 위계되었다. 가이슈고(甲斐守護)를 대대로 역임한 가이겐씨다케다가(甲斐源氏武田家)의 적자로서 태어났다. 이웃국인 시나노(信濃)를 침공,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川中島の戦い)를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가이, 시나노, 스루가(駿河), 니시 고즈케(西上野), 도토미(遠江), 미카와(三河)와 미노(美濃)의 일부 영지로 했지만, 상경 도중에 미카와에서 발병해서 시나노에서 병사한다.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5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의 전투로 유명하다.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군기를 사용하고,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리었다. 그가 이끈 다케다 군은 전국시대 최강이라고 평해진다. 다이쇼 시대(大正期; 1912-1926)에는 종3위(從三位)에 추대되었다.

가이슈고

1521년 음력 11월 3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적자로서 가이 국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 현 요가이 산성(要害山城))에서 태어났다. 아명는 가쓰치요(勝千代)이다. 아버지는 가이겐씨의 명문 다케다가의 제18대 도슈(当主) 다케다 노부토라로 가이를 통일한 전국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용장이다. 신겐이 태어난 1521년에 가이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명을 받고 구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가 이끄는 15,000명의 군에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다케다 군은 신겐의 탄생으로 사기가 올라 이마가와 군을 격퇴시켰다고 전해진다. 1525년에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노부시게를 편애하고, 그에 따라 하루노부의 성격이 서서히 거칠어졌다고 한다. 고요군칸(甲陽軍鑑)에는 1538년 정초에 아버지 노부토라는 하루노부에게 술잔을 주지 않고,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준 일화가 있다.

처음 아내를 맞이한 것은 1533년 아버지의 정략에 따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딸을 맞이한다. 둘 사이에는 금슬이 좋아다고 한다. 하지만, 1534년 아내는 임신을 했지만, 사산하고 그녀도 죽었다. 이 때문에 계실로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딸을 맞이하게 된다.

1536년에 이마가와 우지테루(今川氏輝)가 죽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대를 이어면서 이마가와씨와 화친하고, 요시모토의 알선으로 타로(신겐)는 산조 긴요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같은 해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이름을 받아 하루노부로 개명한다. 첫 출진은 시나노의 운노구치 성(海の口城)의 성주 히라가 젠신(平賀源心)을 공격한다.

1541년 하루노부 21살 때 슈쿠로(宿老)로 있는 자국내 유력한 영주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信方)와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 그리고 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 등으로부터 옹립되어 아버지를 스루가로 추방한다. 그리고, 다케다가 제19대 도슈로 가독을 상속한다. 노부토라 추방의 이유는 후세의 사료에는 악행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진위는 불명확하다. 노부토라는 각방면에서의 계속된 전쟁과 자국내 영주 세력을 통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으로 인해 부하들의 모반을 초래하게 된다. 아버지 노부토라의 추방과 하루노부의 가독 상속은 가이의 자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나노 평정

노부토라를 추방한 직후, 시나노의 스와 우에하라 성(諏訪 上原城) 성주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와 하야시 성(林城) 성주로 있는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가 가이에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격퇴한다. 그리고, 1542년 6월, 하루노부는 거꾸로 스와를 공격한다. 마침 스와씨 내부에서는 스와 요리시게와 다카토 요리쓰구(高遠頼継)에 의한 스와종가를 둘러싼 정쟁이 일어 났기 때문에 하루노부는 이것에 개입, 다카토 요리쓰구와 손을 잡고 스와 요리시게를 멸문시킨다. 그리고 스와를 평정한다. 계속해서 같은 해 음력 10월, 스와령 분할 문제로 다카토 요리쓰구와 대립하고, 다카토 군을 고부치자와(小淵沢)에서 격파한다.

1543년 시나노 나가쿠보 성(長窪城) 성주 오이 사다타카(大井貞隆)를 공격해 자결로 몰았다. 1545년 4월, 우에 이나(上伊奈)의 다카토 성(高遠城)을 공격해 다카토 요리쓰구를, 계속해서 음력 6월에는 후쿠요 성(福与城)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藤沢頼親)도 멸문한다.

1547년 시가 성(志賀城)의 가사하라 기요시게(笠原清繁)를 공격한다. 그때 가사하라 군에는 고즈케(上野)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의 원군도 있었기에 고전하지만, 음력 8월6일 오타이하라 전투(小田井原の戦い)에서 다케다 군은 우에스기=가사하라 연합군에 대승한다. 그런데, 하루노부는 적병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3천 명의 적병을 전부 학살한다. 더욱이 여자 아이를 인질 노예로 하는 등 과혹한 처분을 했다. 이 사건의 의해 시나노국의 영주들은 하루노부를 믿지 못하게 되고, 시나노 평정을 크게 퇴보시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분국법으로 있는 신겐가법(甲州法度之次第(信玄家法))을 정한다.

1548년 음력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 북부에 세력을 자랑하는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와 우에다하라(上田原)에서 격돌한다(우에다하라 전투(上田原の戦い)). 그러나, 병력의 우세로 있는 다케다 군이 무라카미 군에 패해 슈쿠로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을 비롯 많은 장병을 잃는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당해 고후(甲府)의 유무라 온천(湯村温泉)에서 30일간 치료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음력 4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스와로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7월에 시오지리고개 전투(塩尻峠の戦い; 가쓰쓰루고개 전투(勝弦峠の戦い))에서 오가사와라 군에 대승한다.

1550년 음력 7월, 하루노부는 오가사와라령을 공격한다. 이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저항할 힘이 없어 하야시 성을 버리고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밑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해서 나카 시나노(中信濃)는 다케다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이 기세로 하루노부는 9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인 도이시 성(砥石城)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후세에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고 전해지며, 다케다 군은 대패를 경험하고, 요코타 다카토시(横田高松)와 오야마다 노부아리(小山田信有)를 비롯 천 명 이상의 장병을 잃는다.

그러나 1551년 음력 4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또는 사나다 유키쓰나(真田幸綱)의 책략으로 도이시 성을 함락하고, 이를 계기로 다케다 군은 순탄하게 우위에 서게 되었다. 1553년 음력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쓰라오 성(葛尾城)을 버리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겐신)의 밑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해서 히가시 시나노(東信濃)도 다케다가의 지배하에 있기 되고, 하루노부는 기타 시나노(北信濃)를 제외한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3년 음력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요청을 받은 나가오 가게토라는 5천의 군을 이끌고 시나노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한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와 가게토라는 서로 대치만 한 채 5월에 양군은 함께 철퇴한다.

8월, 가게토라의 지원을 받은 오이 노부히로(大井信広)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즉각 진압한다.

1554년 봄, 나가오 가게토라에 대항하기 위해, 하루노부는 장남 요시노부(義信)의 정실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며느리로 맏이해 이마가와씨와 동맹을 맺는다. 또, 자신의 딸은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장남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시집보내 고호조씨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마가와씨도 다케다가의 중개로 호조씨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고소슨3국동맹(甲相駿三国同盟)이다.

1555년 음력 4월,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양국은 음력 10월에 화친하고 철퇴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 군이 에치고로 철퇴하자마자, 겸사겸사 가게토라에게 의지하여 반항하고 있는 기소 요시야스(木曽義康), 기소 요시마사(木曽義昌) 부자를 공격, 굴복시킨다.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1557년 나가오 가게토라가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었고, 더욱이 가게토라가 없는 사이에 가가(加賀), 엣추(越中)에서 잇코잇키(一向一揆)가 일어났기 때문에 나가오 군은 철퇴한다.

1559년 음력 5월 하루노부는 출가해서 신겐으로 개명한다.

1561년 음력 9월10일, 다케다 신겐 군 2만과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 우에스기 겐신) 군 만3천이 4번째 가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인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 전투는 지금까지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중 최대 규모의 전투이다. 양군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諸角虎定),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사에구사 모리나오(三枝守直) 등 유력 무장을 다수 잃었다고 전해진다.

1564년에도 우에스기 군과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지만, 충돌 없이 끝난다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마가와, 호조 가문과의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후, 신겐은 공격 방향을 고즈케(上野)로 전환하지만,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옛 신하였던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의 선전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나, 1561년 나리마사가 죽자 다케다 군은 대를 이은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를 격렬하게 공격, 1566년 음력 9월에는 미노와 성(箕輪城)을 함락하고 고즈케 서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1560년 음력 5월, 다케다가의 맹우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전사함에 따라, 이마가와가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겐은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적자 다게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가 격렬히 반대한다. 신겐은 1565년 오부 도라마사를 할복시키고, 1567년 음력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고 간다 (병사설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1568년 음력 12월, 미카와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공동으로 스루가로 침공을 개시한다. 이마가와 군도 저항했지만, 마쓰노 산(松野山)에서 오기 기요타카(荻清誉)를, 삿타 산(薩垂山)에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를 격파하고 이마가와야카타(今川館)로 입성한다. 그러나, 이마가와씨와 친척 관계로 있는 호조 우지야스가 이마가와씨의 원군으로 온다. 더욱이 스루가 정복을 기획한 이에야스도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신겐을 적대했기 때문에 호조=도쿠가와 연합군과의 싸움의 불리함을 깨닫고, 1569년 요코야마 성(横山城)에 아나야마 노부키미(穴山信君)를 남겨놓은채, 음력 4월 다케다 군 본대는 일단 가이로 철퇴한다.

음력 9월,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조씨를 억누르기 위해 고즈케,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로 침공한다. 음력 10월1일에는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하지만, 4일 후에 재빨리 포위를 풀었다. 호조 우지야스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 호조 우지쿠니(北条氏邦) 등을 다케다 군의 가이에로의 퇴각로에 포진시키고, 오다와라로부터는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를 출진시켜 양동작전하는 구상을 했지만, 음력 10월8일 미마세 고개(三増峠)에서 다케다 신겐 군과 우지테루, 우지쿠니 군이 격돌, 다케다 군이 대승한다 (미마세고개 전투(三増峠の戦い)). 이렇게 호조 우지야스를 제압한 후, 1570년 음력 7월 재차 스루가를 침공, 완전히 평정한다.

호조 가문과의 동맹

1568년 음력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上洛)을 달성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한다. 하지만, 요시아키와 노부나가는 대립하게되고,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멸문하기 위해, 신겐에게 노부나가 토벌 어내서를 발행한다. 신겐도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를 우려했기 때문에 1571년 음력 2월 노부나가의 맹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도토미, 미카와를 침공한다. 신겐은 음력 5월까지 오야마 성(小山城), 아스케 성(足助城), 다미네 성(田峯城), 노다 성(野田城), 니렌기 성(二連木城)을 접수한 후에 가이로 귀환한다. 1571년 음력 10월 3일, 호조 우지야스가 오다와라에서 죽고, 대를 이은 적자 우지마사는 "다시 다케다와 화친해라" 라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생 호조 우지타다(北条氏忠), 호조 우지노리(北条氏規)를 인질로서 가이로 보낸다. 그리고, 음력 12월27일에는 신겐과 고소동맹을 맺는다. 이 시기 다케다가의 영토는 가이 일국외 시나노, 스루가, 고즈케 서부, 도토미, 미카와, 히다(飛騨}}, 엣추의 일부까지 약 120만 석에 달한다.

서상

노부나가는 1565년 히가시 미노(東美濃)의 영주 도야마씨의 여자를 노부나가의 양녀로 해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 시집보내서 신겐과 동맹을 맺는다. 이 양녀는 다케다 신겐의 적손을 출산한 후 죽었지만, 계속해서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 신겐의 딸 마쓰히메(松姫)가 약혼했다. 도쿠가와씨와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서도 오다씨와 다케다씨는 계속 동맹관계에 있었다. 1572년 음력 10월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서 노부나가와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을 하기 위해 고후(甲府)를 출발한다. (단, 신겐은 노부나가에게 우호적 서찰을 계속 보내는 등, 더욱 더 동맹관계를 계속유지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 약 3만의 전군중, 3천을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에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県昌景)에게 5천을 주어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보내고, 스스로는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와 함께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아오구즈레 고개(青崩峠)로부터 도토미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은 고호죠가의 원군 2천도 가세해 2만2천이었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는 음력 10월 13일 다다라이 성(只来城), 아마카타 성(天方城), 이치노미야 성(一宮城), 이이다 성(飯田城), 가쿠와 성(各和城), 무카사 성(向笠城) 등 도쿠가와의 성들을 하루 만에 접수한다. 야마카타 마사카게 군은 가키모토 성(柿本城), 이다이라 성(井平城)을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 아키야마 노부토모 군은 음력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지인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접수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일향종(一向宗) 등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3천의 원군만을 보낸다. 이에야스는 음력 10월14일, 다케다 군과 도토미의 히토코토자카(一言坂)에서 싸우지만, 병력차와 신겐의 교묘한 전술에 패한다 (히토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 음력 12월19일에는 도토미의 요충으로 있는 후타마타 성(二俣城)을 함락시킨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하마마쓰(浜松)에서 농성을 생각하지만, 다케다 군의 움직임을 봐서 병사 만천을 이끌고 출진,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음력 12월22일 신겐과 일대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병력차와 함께 신겐의 전술앞에 대패하고, 도쿠가와 군은 많은 장병을 잃고 패주한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맹우 아자이 나가마사의 원군으로 기타 오미(北近江)에 진을 치고 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철퇴를 알게 된다. 신겐은 격노하여, 요시카게에게 문서를 보낸다 (이노 문서(伊能文書)). 그러나 요시카게는 그 후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겐은 군대의 움직임을 멈추고 해를 넘긴다. 하지만, 다시 1573년 음력 1월에 미카와를 침공하고 음력 2월10일에는 노다 성(野田城)을 접수한다 (노다 성 전투(野田城の戦い)).

말년

노다 성을 접수한 직후부터 신겐의 지병이 악화되어, 다케다 군은 돌연 진격을 멈춘다.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 성(長篠城)에서 요양하지만, 별진전이 없어 음력 4월 초순에는 결국 가이로 철퇴를 결의하게 된다. 음력 4월 12일, 가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병사한다. 향년 53세, 묘소는 야마나시 현 고슈 시의 에린지(山梨県甲州市恵林寺)이다.

유언

신겐의 유언에 관해서 신뢰할 수 있는 동시대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세의 사서나 이야기 등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 정말 신겐의 유언인지 믿을 수 없다.

내가 죽은 후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해라, 또 3년간 상을 비밀로 해라.
 
— 가쓰요리에게,
겐시로(源四郎), 내일은 세다(瀬田; 비와 호 남단)에 우리 다케다의 기를 세워라.
 

정책

  • 황무지 개간

다케다씨의 본거지로 있는 가이는 평야가 적어 년공수입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황무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그때까지 하천의 범람으로 농지로 쓸 수 없었던 토지도 농경이 가능하도록 신겐쓰쓰미(信玄堤)라고 불리는 제방을 쌓고, 하천의 흐름을 바꾸어 개간했다.

  • 금화의 제조

일본에 첫 금화인 고이시긴(碁石金)을 제조했다. 가이에는 풍부한 매장량의 금광이 존재하였고, 포르투갈, 스페인인들의 왕래에 의해 굴삭기술과 정련수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막대한 양의 금을 산출하고, 이렇게 모은 금을 치수사업과 군사비로 사용했다. 또 오다 노부나가우에스기 겐신에 적대하는 세력에게 지원하는 등, 외교면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단, 고이시긴은 통상 유통에서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또 금광의 채굴에 관해서도 다케다씨는 직접지배를 하지 않고, 금광채굴자라 불리는 기술자 집단에 소유권 명목으로 보상을 받았다.

인물

명언

사람은 성, 사람은 돌담, 사람은 해자, 정은 우리편, 원수는 적이 된다.

(성의 어떤 곳만 견고하게 하면, 사람의 마음은 떠나버려서,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정은 사람을 결속시키고, 결과로써 나라를 번영게하지만, 원수를 많이 만들면 나라는 멸망한다.)

이 말대로, 신겐은 그의 생애에 단 한번도 가이국내에 새로운 성을 만들지 않고, 해자 하나의 쓰쓰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에 살았다. 단, 배후에는 가까운 성인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이 있는 전형적인 전국무장의 거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이말은 후세의 창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능히 신겐의 이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릇 군의 승리를 5분 가지면 상이되고, 7분을 가지면 중이되고, 10분을 가지면 하가 된다. 그 이유는 5분은 격려를 낳고, 7분은 나태를 낳고, 10분은 교만을 낳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서 10분의 승리를 얻어 교만을 낳는다면 다음에는 반드시 패하게 된다. 모든 전쟁에 한하지 않고 세상속의 일에도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승자에게 교만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신겐 사후 연전연승을 한 가쓰요리가 나가시노에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된 것을 생각하면 실제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고요군칸(甲陽軍鑑)의 각색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풍림화산

其疾如 其徐如 侵掠如 不動如 …… 難知如陰 動如雷震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는 숲과 같다. 치고 앗을 때는 불같이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한다. …… 숨을 때는 어둠 속에 잠긴 듯 하다가도, 움직일 때는 벼락치듯 적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한다.)

손자병법에 기록된 말로, 종종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신겐은 이것을 군기로 사용했다. 또, 그의 군기는 에린지(恵林寺)의 주지 가이센 죠키(快川紹喜)의 책으로 전해진다.

그 외

  • 신겐이 가스가 겐스케(春日源介)와 바람핀 것을 밝혀 주는 편지가 현존한다. 당시에는 남색은 일반적이었다고 전해짐에 따라 여색보다도 고상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다.(후에 가스가 겐스게는 가스가 도라쓰나(春日虎綱),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로 개명한다.)
  •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신겐은 재가출가하였으면서도 속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등, 불교에 척을 지닌 행위를 했다. 단, 이것은 신겐뿐 아니라, 당시 다수의 무사들도 재가출가후에도 출가 이전과 같은 생활을 보냈다. 당시의 유력 사찰이나 신사의 존경받는 자들도 직위를 이용하여 여자에게 손을 대는 일이 많았다. 또, 속세에 관한 무장투쟁도 그치지 않았다. 신겐은 이런 종교세력의 일원 혹은 협력자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에 있었고, 불교를 통해 종교세력과 결탁하여 잇기를 조정하고, 이로 인해 다른 다이묘의 견제와 전력의 분산을 꾀했다. 그리고, 신겐은 히에이 산(比叡山)의 승려로부터 다이소조이(大僧正位)의 직위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겐은 자신의 지위향상에도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 혼간지의 겐뇨(顕如)의 부인 뇨슌니(如春尼)와 신겐의 정실 산조노카타(三条の方)는 친자매관계이다. 이 같은 일과 가신들도 출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겐 개인뿐만 아니라 다케다가는 종교세력과 관계가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쓰쓰지가사키야카타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쓰쓰지가사키야카타의 안쪽으로부터 흐르는 물을 이용한 구조로 신겐은 여기를 산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용변외에 서재 등으로도 사용했다. 가신이 "왜, 뒷간을 산이라 부릅니까?"라고 묻자, 신겐은 "산에는 항상 초목(냄새)이 끊이지 않으니까."라고 기지 넘치게 대답했다고 한다.
  • 고요군칸에 의하면, 노부나가로부터 평상복(고소데)(小袖)를 선물받았을 때에는 신겐은 이것이 들어있던 옻칠된 상자를 살펴보면서, 이 옻칠은 몇 번이나 칠해져 있는지를 보고 "이는 오다가의 성의를 나타낸 것이니, 다케다가에 대한 마음이 진실이구나."라고 말했던 일로 부터, 노부나가의 진의를 특히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일화

  • 신겐은 꽤 오래전부터 병을 앓은 것으로 보인다. 첫 상경을 개시한 날짜를 10월1일에서 10월3일로 연기한 것은 신겐의 병이 일시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 신겐은 정보 수집를 중시해서 미쓰모노(三ツ者)라고 불리는 비밀 조직을 이용해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고요군칸에서는 미쓰모노외 素坡라는 표현도 있다.) 또 의지할 곳 없는 여자아이들을 모아 닌자술을 가르쳐, 밖으로는 아루키미코(歩き巫女)로써 전국에 배치, 첩보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겐이 전쟁에 항상 승리를 계속했던 것은 항상 이같은 정보 수집이 빨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신겐은 가이에 살면서 일본각지의 정보를 알고 있어서 마치 일본 안을 순시한 것 같은 인상을 풍겨 아시나가보즈(足長坊主)라는 이명도 있다.
  • 상경 때에 고요군칸에서는, 다음과 같이 신겐 자신이 기술한 것 같은 기록도 있다. 엔슈, 미카와, 미노, 오와리에서 출발해서 살아있는 동안 천하를 평정하고 수도에 기를 꽂는다. 그래서, 불법, 왕법, 신도, 여러 무사의 작법를 정하고, 정치를 옳게 집행하는 것이 신겐의 바람이다.

사인

지병은 폐결핵, 폐렴 혹은 위암 혹은 식도암에 의한 병사설이 유력하다. 도쿠가와 군의 총탄에 의한 상처가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다케다 군이 미카와국 노다 성을 포위중 신겐이 성으로부터 들리는 피리소리에 취해 있을 때, 저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마쓰다이라키(松平記) 등 도쿠가와측 사료 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 도쿠가와 일족이 신겐을 전사시키고 싶어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흡혈충의 기생에 의한 체력 저하라는 설도 있다.

수중묘 전설

다케다 신겐이 죽을 때,

나의 죽음을 3년간 비밀로 해라. 유해는 갑옷을 입혀 스와 호(諏訪湖)에 수장해라.

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고요군칸에도 같은 기술이 있다. 이 때문에 스와 호에 오래전부터 신겐의 수중묘 전설이 있다. 1986년, 일본 국토지리원해상자위대에 의해 해저지형조사에서 호수 바닥 한쪽 면에 25 m 정도의 마름모꼴 형태의 물체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신겐의 수중묘가 아닐까 생각되고, 신슈 대학(信州大学),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니혼 텔레비(日本テレビ) 등 복수 단체가 10수년에 걸쳐 조사를 했다. 전자파심지기에 의해 묘라고 여겨지는 물체가 확인되었다고 보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수수께끼의 마름모 형태는 호수 바닥의 움푹패인 땅의 그림자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문제의 마름모 형태가 자연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볼 수 없는 정도이고, 호수 바닥의 진흙이 시야를 가려 현지조사가 곤란해서,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중묘의 전설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현재에도 많다.

아버지 추방에 관해서

최근, 신겐은 노신의 꼭두각시로, 아버지 추방은 가이국의 유력영주들의 쿠테타라는 설이 있다. 이 이유는 신겐이 16세에 처음 출진했다는 날은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에 이마가와가의 가독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학회에 따르면 20세에 처음 출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센고쿠 다이묘로써는 너무 늦은 시기라, 이와 같은 설이 나온 것 같다.

계보

세이와겐씨(清和源氏)의 중 가와치겐씨(河内源氏)계의 미나모토 노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郎義光))를 조상로 해서, 대대로 가이슈고를 역임한 가이겐씨(甲斐源氏)라고 불린다. 신겐의 이 다케다씨의 제19대 도슈이다. 다케다가는 겐페이시대(源平時代)에는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가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源頼朝)와 미나모토 노 요시나카(源義仲)와 함께 다이라 노 기요모리(平清盛) 토벌의 명령을 받는 등, 예부터 무용이 출중한 집안이다.

신겐의 처는 사다이진(左大臣)으로 있는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딸 산조 노 가타(三条の方) 외,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의 딸 등, 다수의 부인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사료적으로 확실한 것은 산조 노 가타, 스와 고료우닌(諏訪御料人), 네쓰 고료우닌(禰津御寮人), 아부라가와 부진(油川夫人), 이 네 명이다. 현재로는 신겐의 처는 이 네 명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 다케다가의 후손으로는 사에구사케(三枝家)가 유명하다.

다케다 24장

다케다 신겐을 모신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평가 높은 24명의 무장을 가리켜 다케다 24장이라고 말한다. 원전은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그림에서 있을 뿐, 정식으로 다케다가의 24장이라고 구분짓는 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된 장수들도 활약한 시대가 다르며, 전원이 동시대에 신겐을 모신 일은 없다. 서민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 것 같다. 자료에 따라 24장의 목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래와 같다.


고요 오명신

고요 오명신(甲陽 五名臣)은 다케다가의 아시가루[1] 대장을 가리킨다. 주로 다케다 노부토라 시절부터 하루노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들이다.

다케다 사천왕 혹은 사명신

대를 이어 다케다 가쓰요리를 지지했던 4명의 무장을 말한다.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신겐 때:

주석

  1. 잡병으로 졸병을 뜻한다. 아시가루란 말은 발놀림을 가볍게 해 달리는 사람이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