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독 상속
1530년 음력 1월21일 에치고 슈고다이† 나가오 다메카게†의 차남으로 가스가 산성†에서 태어났다. 1536년 아버지 다메카게가 병사하고 가독은 형 나가오 하루카게†가 이어받는다. 그리고 겐신은 성 아래 린센지†에 입문해 주지 덴시쓰 고이쿠†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1543년 음력 8월 15일에 성인식을 하고 나가오 가게토라†라고 개명한 뒤, 나카 에치고†의 나가오 가의 영지 통치를 위해 도치오 성†으로 입성한다.
당시 에치고에는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다테 다네무네†를 양자로 들이는 일로 인해 내란이 일어났다. 가게토라는 성인식을 한 그해 형 하루카게를 보좌하면서 에치고의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첫 출전을 장식한다. 1546년에는 구로타키 성주† 구로다 히데타다†가 나가오씨에 대한 모반을 일으키면서 가게토라는 형을 대신해 우에스기 사다자네부터 토벌명을 받고, 총대장으로서 구로다씨를 멸문한다. 1548년 사다자네의 조정을 바탕으로 하루카게는 가게토라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양도한 후 은거한다. 가게토라는 나가오씨의 본거지로 있는 가스가 산성에 입성하고 19세에 에치고슈고다이가 된다. 2년후 1550년에는 사다자네가 후계 없이 죽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가게토라의 에치고 다이묘의 직위를 인정한다.
1550년 같은 일족인 사카토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가 가게토라의 가독상속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게토라는 다음해 1551년 이를 진압한다, 그 즈음에 호조 우지야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고즈케 히라이 성†에 근거를 둔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에치고에 구원을 요청한다. 가게토라는 즉시 출병해 호조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노리마사를 히라이 성으로 돌려 보낸다. 에치고의 이웃국인 고즈케로 힘을 뻣친 호조 가문는 에치고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551년 음력 1월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에치고에 맞아들인다. 음력 8월 종오위하 단조쇼히쓰†에 취임한다. 1553년 음력 9월 상경해 고나라 천황†과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다. 같은 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당시는 하루노부†)이 시나노†를 침공해 영지를 빼앗긴 무라카미 요시키요†, 다카나시 마사요리†(가게토라의 숙부) 등의 시나노국 영주의 영지복권를 위해 가게토라의 밑으로 도망친다. 8월에는 그것에 호응해 시나노로 출병,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신겐과 대치한다.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4년 가신 기타조 다카히로†가 다케다 신겐을 통해 모반을 일으키지만, 1555년에 직접 출진해 이를 진압한다. 음력 4월 신겐과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시 대치하지만, 아무른 진척없이 5개월 동안 대치한다. 결국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화친하고 철퇴한다.(제2차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런데 갑자기 1556년 음력 6월, 가게토라는 출가를 선언하고 고야 산†(일설에는 히에이 산†)으로 출가한다. 아마 다케다 신겐과의 전쟁과 가신으로 있는 나가오 마사카게, 기타조 다카히로, 오쿠마 도모히데†의 반란으로 심신이 피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덴시쓰 고이쿠, 나가오 마사카게의 설득으로 출가를 단념한다.
1557년 음력 4월, 가게토라는 다시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다케다 군과 서로 대치만 한 채로 끝났다. 더욱이 엣추†에서 잇코잇키†가 일어났기 때문에 철퇴하는 것외 다른 방도가 없었다. 1559년 음력 4월, 가게토라는 교토로 상경해서 오기마치 천황†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다. 가게토라는 그때 요시테루로부터 관령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된다.(우에스기의 칠면허†). 이 즈음에 요시테루는 가신 오다치 하루미쓰†를 파견해 나가오 가게토라,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이 세사람이 화친해서 미요시 나가요시†의 세력을 몰아 내주기를 바랐지만, 세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심해 실현되지 못 했다.
1560년 음력 3월, 가게토라는 엣추로 출진해 시이나 야스타네†를 돕는다. 그 해 5월에는 간토로 출진해 마야바시 성†에서 한 해를 보낸다. 1561년 음력 3월,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거느린 10만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함락할 수 없어 1개월후에 가마쿠라†로 철퇴한다. 그때 노리마사의 요청으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 있는 야마노우치우에스기씨†의 가독과 관동관령 직을 상속받아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바꾼다.
귀국 후 그 해 음력 8월, 마사토라는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또 다시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한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 다케다 군의 다케다 노부시게†, 야마모토 간스케† 등을 죽였지만, 우에스기 군의 피해도 커 사실상 전투의 소득은 없었다.
그 해 음력 11월, 마사토라는 다시 간토로 나아가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와 겨룬다. 그러나 가와나카지마에서의 피해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게 되자, 나리타 나가야스†, 사노 마사쓰나†는 호조 쪽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 해 12월, 마사토라는 쇼군 요시테루의 이름을 받아 데루토라†라고 개명한다.
다케다 가문, 호조 가문과의 전투
다케다 신겐과 기타 시나노를 둘러싼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했지만, 결말이 나지 않고, 결국 시나노의 북쪽 일부만 장악, 무라카미 가문과 다카나시 가문 등의 옛 영지는 회복할 수 없었다. 1564년에도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시 대치한다. 그러나, 60일간 대치끝에 철퇴한다.
1568년 엣추의 잇코잇키와 시이나 야스타네가 다케다 신겐과 내통하고 있는 엣추를 제압하기 위해 엣추 마쓰쿠라 성†, 엣추 모리야마 성†을 공격했지만, 음력 5월 신겐과 내통한 중신 혼조 시게나가†의 모반 때문에 에치고로 돌아간다. 음력 11월, 시게나가의 모반을 진압, 12월, 다케다과 단교한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구원을 요청한다. 12월에는 아시나 모리우지†의 중개로 혼조 시게나가의 적자 혼조 아키나가†를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해서 시게나가의 귀국을 허락한다.
1569년 음력 3월,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데루토라는 호조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월상동맹†). 1570년 우지야스의 7번째 아들로 있는 호조 우지히데†를 양자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우지히데가 맘에 들어 자신의 이름이었던 가게토라라는 이름을 주는가 하면 일족으로서 후대했다고 한다. 12월에는 법명을 겐신†으로 정한다.
엣추, 간토출병
1571년 호조 우지야스가 죽고, 대를 이은 호조 우지마사†는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파기, 다케다 신겐과 다시 화친했기 때문에, 양 군대는 도네 강†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8월, 북국†[1]으로 공격 방향을 돌려 엣추의 잇코잇키세력으로부터 도야마 성†을 빼앗는다. 11월, 신겐과 교전상황에 들어간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제의를 받는다. 그후 엣추로 출진하지만, 신겐과 내통 반란을 일으킨 잇코잇키에 괴로워하며, 연말까지 잇코잇키와 싸움끝에 그들을 제압한다.
1573년 숙적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씨의 위협이 수그러들자 엣추의 과반을 제압한다. 같은 해 호조 우지마사가 고즈케를 침공하자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1574년 간토으로 출진 가나야마 산성†, 기사이 성†, 하뉴 성†등 관동의 여러성을 차례차례 공략한다. 연말에는 삭발을 하고 호인다이오쇼†를 맡는다. 1575년 1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단조쇼히쓰을 양도한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1576년 음력2월, 노부나가와의 전투로 곤경에 처한 혼간지†의 겐뇨†와 강화를 맺는다. 이 때, 다케다 가쓰요리†와도 화친을 하고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파기, 새롭게 겐신을 맹주로하는 반 노부나가 포위망이 구축된다.
1576년 음력 9월, 엣추를 공격 진보 우지하루†지배하의 도야마 성, 모리야마 성을 접수한다. 다음엔 시이나 야스타네의 하수누마 성†을 함락하고 야스타네를 죽인다. 이렇게 해서 엣추를 평정한다. 11월, 노토†로 진격 하타케야마 가문†의 거성 나나오 성†을 포위한다(나나오 성 전투). 그러나, 나나오 성은 견고해서 공격하다 못해 해를 넘긴다. 1577년 호조 우지마사가 에치고, 고즈케를 침공했기 때문에, 가스가 산성으로 철퇴한다. 이 사이 하타케야마 군에 의해 우에스기 군이 전년에 빼앗았던 노토의 여러 성을 함락당하지만, 윤7월, 다시 노토를 공격하고, 나나오 성을 포위한다. 이 때, 성내에서 전염병이 유행, 전쟁에 염증을 느낀 유사 쓰구미쓰†가 겐신과 내통 반란을 일으킨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는 조 쓰구쓰라†을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나나오 성은 함락되고, 노토도 완전히 우에스기의 지배하로 들어온다.
한편, 조 쓰구쓰라의 원군 요청을 받은 오다 가문은 시바타 가쓰이에†의 선발대 3만, 노부나가가 이끄는 본대 만팔천이 가가†로 향한다. 겐신은 나나오 성으로 오는 오다 군을 쫓아 공격하기 위해 음력 9월17일 스에모리 성†을 함락하고, 음력 9월18일에는 마쓰나미 성†을 공격 함락한다. 음력 9월23일,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 군은 데토리 강†를 건널때 나나오 성의 함락을 안다. 이에 당황한 가쓰이에는 철퇴 명령을 내렸지만, 겐신은 강을 건너는데 허둥지둥대는 오다 군을 추격, 대승을 거둔다. (데토리가와 전투)
말년
1577년 음력 12월 18일, 겐신은 가스가 산성으로 귀환하고, 음력 12월 23일에는 다음 원정을 위해 동원령을 포고한다. 1578년 음력 3월 15일에는 원정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정일을 6일 앞둔 음력 3월 9일, 겐신은 원정 준비 중 가스가 산성에서 쓰러져, 음력 3월 13일 급사한다. 향년 49세.
미완에 그친 원정에서, 그가 상경해 오다 노부나가를 타도하려고 했는지, 간토를 재침공하려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최근에는 간토 침공설이 유력하다.)
인물
- 선천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서, 형으로부터 호명을 받아 성인식을 하자 나가오 가문의 가신들은 말할 것 없이 호족들의 마음도 휘어잡았다.
- 겐신은 천재형 인간으로 신속한 용병 투입과 임기응변적 전술이 그의 생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라는 당대 굴지의 무장과 전투를 계속하고, 한번도 패배가 없었던 능력은 높게 평가된다.
- 전략가, 전술가로서뿐 아니라, 와카†에 능통하고, 명필이기도 했다. 고노에 다네이에†로부터 와카의 비법을 전수받는 등, 황실과의 교류도 깊은 문화인이었다. 특히 겐지모노카타리†를 비롯하여 연애물을 즐겨 읽었고, 상경했을 때에는 와카대회에서 참가해 뛰어난 가카†(렌카†, 남여간의 애정노래)를 낭독해, 참가자 전원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 나나오 성 전투때, 겐신은 유명한 주산야†를 작시했다고 한다.
- 비사문천†의 열렬한 신자로, 자신의 기에도 비†라는 문자를 사용했다. 이것은 비사문천을 닮기를 바라는 것으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 청년기까지는 소도슈†의 고찰 린센지†에서 스승 덴시쓰 고이쿠로부터 선을 배우고, 상경때에는 린자이슈†의 고찰 다이토쿠지†에서 참선을 하고 †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만년에는 신곤슈†쪽에 관심을 가져 고야 산† 곤고부지†의 세인†으로부터 덴보칸조†(불법을 전수받는 의식)을 받는다. 그리고, 아쟈리겐다이소토†라는 직위를 받는다.
- 일반적으로 "싸움에는 뛰어나고 내정에는 서툴다"는 인상이지만, 실제에는 영내의 물품의 유통관리를 정비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겐신이 사후, 가스가 산성에는 27,140량이 저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에스기 군의 군자금은 통상교역에 의해서 얻었다고 한다. 라이 산요†(에도시대 문장가)가 미담이라고 격찬했던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라는 에피소드도, 실제로는 군비조달의 필요성 때문에 가이상인에게 소금판매를 금지하지 않았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에치고 국 영주들의 이반에 대해서는 자주 고민을 한 것 같다. 겐신도 신겐과 같이 영주들의 연합맹주라는 지위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 전쟁시에는 정보를 얻는 것을 중시하여, 노키자루†이라는 닌자 집단을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 육척(약 180cm) 가까이되는 장부라고 말하는 유력설이 있지만, 왜소하다는 기록도 문헌에 존재하고, 최근에는 유품의 갑옷의 크기로 미루어 오척이치(약 156cm)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남성의 평균신장(약159cm)보다 체격이 좋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일화
- 스스로를 비사문천의 전생으로 믿는 겐신이지만, 올바른 길을 벗어난 행동도 했었다. 1559년 상경중 사카이†에서 무례한 행동을 한 여관 주인을 죽이고, 이에 항의하는 마을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더욱이 마을을 불질렀다고 한다. 다른 것으로도 마야바시 성의 성주의 가신 나가오 가네타다†를 아무런 대답없이 죽었다.(살해 이유는 가네타다의 모반할 것 같은 직감이었던 것 같다.) 그의 친척도 다수 살해되는 등,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괴상한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는 일화가 남아있다.
- 비사문천의 전생으로 믿고 있는 나머지, 겐신은 자기행동에 대해서는 이유불문하고 정당화시키려는 것 같다. 그같은 이유로는 살인을 한 것은 사적인것이지만, 그는 후회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그것과 같이, 총탄이 두발에 스쳐도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믿고 두려움없이 싸우거나, 전투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글을 신사와 절에 봉납했다고 전해진다. 일종의 병적인 광기에 취한 일면을 가진 천재라 하겠다.
- 1556년, 갑자기 출가소동을 일으킨다. 직접적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끊이지 않는 가신들간의 정쟁과 이반으로 질리지 않나 여겨지고, 한편으로는 인신장악을 위해 폭언을 했다고 한다. 혼란의 격화를 우려한 가신단은 겐신에게 "以後は謹んで臣從し二心を抱かず(이후에는 삼가 신하로서 불충한 마음을 품치 않겠음)"라고 적힌 글을 올려, 소동을 무마했다.
- 1561년, 간토칸레의 취임식에서는 오시 성† 성주 나리타 나가야스†의 무례에 격분해서 나가야스의 안면을 부채로 때렸다고 한다. 여러 무장들 앞에서 굴욕을 받은 나가야스는 즉각 병력을 이끌고 귀성했다. 원인은 여러 무장이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는 데 반해 나리타 나가야스만 말 위에서 가볍게 인사를 했기 때문이지만, 나리타씨는 후지와라 가문†(일본고대 귀족)의 뿌리를 두는 명가로 이것이 허락된 것이었다. 겐신은 이런 일을 몰랐다고 보이지만, 이 사건에 의해서 관동의 여러 무장들이 겐신에 대한 반감이 급속 확산된다. 이후 관동진출에 장애가 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겐신은 격분하기 쉽고 신중치 않은 성격으로 보인다.
- 숙적 다케다 신겐의 죽음을 전해 듣고 식사중 겐신은 "아까운 사내가 죽었구나."라고 수저를 놓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신겐이 죽은 지금이야 말로 다케다가를 공격할 호기"라고 공격을 권하는 가신의 의견을 "상을 당한 가쓰요리에게 그같은 일을 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다."라고 거절했다.
- 신겐과의는 생애 인연이 깊지만, 그것으로 두 사람간의 우정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로도 추측된다. 실제 겐신은 신겐을 꽤 증오한 것 같다. 신겐이 부친을 추방하고, 모략으로 적을 궁지로 몰고가는 것은 겐신의 입장에서의 말할 수 있는 도덕적 관점에서 반하는 것이므로, 겐신은 신겐의 행동에 격노했다고 한다. 신겐과의 아무런 이익없이 수많은 전투도, 겐신이 순수하게 신겐을 증오해서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다.
- 그의 부하는 겐신의 식사를 본것만으로 전쟁터로 가야되는지 말아야되는지를 알았다. 아마 그것은 보통 그다지 잘 먹지 않는 겐신이 전쟁을 하기 앞서 꽤 많은 양을 먹었다고 한다.
- 미혼이며, 자식 둘 모두 양자(가게카쓰†, 가게토라†)이다. 미혼의 이유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남색설은 생각하기 어렵다. 센고쿠 무장의 남색은 일반적이었다해도 결혼해 자식을 가졌다. 겐신이 젊었을 때 적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가신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헤어진 후, 그녀는 출가할 때 자살했기 때문에 미혼을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반음양설(중성)과 여자설도 존재한다.
여성설
겐신은 살아 생전 여자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체격이 좋은 여자라는 설이 있다.
- 겐신의 사인으로는 일반적으로 뇌출혈이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갱년기장애에 의한 부인병의 일종인 大虫이라고 기록된 문헌이 몇 개 존재한다. 겐신이 가스가 산성의 뒷간(변소)에서 쓰러졌다는 점, 쓰러진 시기가 음력 3월9일이라는 점, 죽었던 때가 4일후인 13일이라는 점. 향년 49세라는 점도 납득할 수 있다.
- 전투중과 관계없이 매월 10일전후에 원인불명의 복통이 발생하고, 병사를 이끌고 방에서 두문불출한다. (매월 반드시는 아니지만, 빈번히 있었다.) 이 복통이 생리통인지도 모른다.
- 요네자와 번†에 설립된 우에스기 신사에는 겐신의 의류가 남아있지만, 그 옷은 진한 적색으로 현대의 시점에서 본다면 남성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겐신이 가부키†를 했다고는 말할 수도 없다.
- 겐신이 쓴 서장 등을 보면, 필체나 표현등이 여성적인 면이 너무 강해 남자로 생각할 수 없다.
- 스페인의 곤잘레스라는 사람이 쓴 보고서에는 겐신을 가리켜 '가게카쓰의 백모'라고 기재되어 있다.
- 당시, 백성들은 겐신에 관해서 '남자에 필적하는 무력무쌍'이라는 노래인 고제†[2]노래가 있다.
- 각지의 하쿠잔 신사†의 고신타이†는 남녀 한조이지만, 에치고의 하쿠잔 신사만 말을 탄 여성으로 있다. 더욱이 하쿠잔 신사의 하쿠산토†에는 여신상이 있고, 비†라는 기가 놓여있고, 가스가 산성쪽을 향하고 있다.
- 당시, 여성 성주는 드문 것이 아니다. (예를들어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 오쓰야노가타† 등), 여성 성주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 무가제법도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문†과 대립하고 있었고, 도자마 다이묘†로 입지가 약한 우에스기 가문은 대폭 토지가 몰수당했다.(실제 요네자와번 30만 석으로 감봉당했다.) 이에 더하여 무가제법도에서 성주는 남자라는 공식에 따라 "겐신 시기에서 가문이 단절되지 않겠나"하는 우려 때문에, 겐신이 여성이라는 증거를 처분하고, 무리하게 남성으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된다.
- 우에스기 겐신의 초상화는 수염이 있는 남성이지만, 이것은 에도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상기와 같이 겐신을 남성으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여태까지의 것은 처분하고 남성의 초상화를 그렸지 않았나 생각하면. 에도시대전까지 초상화가 없었던 점도 납득할 수 있다.
남성설
- 린센지에 입문한 것, 린센지의 출가는 남성밖에 할 수 없다.
-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고야 산에 올라, 승려 세인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된 점.
사인
- 일반적으로 애주가였고, 안주로는 우메보시†를 곁들여 먹었기 때문에 염분을 너무 많이 섭취, 고혈압이 원인인 뇌출혈로 죽었다고 한다(눈이 오는 날, 뒷간에서 쓰러졌다고 사료에 있기 때문에,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여겨지는 이유이다). 그 외에는 노부나가가 파견한 자객의 의한 피살설, 大虫으로 죽었다는 설과, 술로 인한 위암, 식도암이라는 설도 있다.
평가
- 군사에 관해서는 에치고의 용과 군신이라는 그를 찬양하는 통칭이있다.
- 겐신과 그밖의 다른 다이묘와의 철포(조총), 활, 기마 등의 군사 편성를 비교하면 별차이가 없고, 전술적으로도 크게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우에스기 군은 적과 적이 서로 부딪치거나, 직접적 전투에서는 압도적 위력를 자랑한다. 그것은 겐신의 정확한 전술 안목과 신출귀몰한 속공, 카리스마로 넘치는 지휘통솔력의 차이라 하겠다. 지휘관으로서 겐신의 재능은 비상하리만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정치명에 관해서는 결코 악정을 했다고 할 수 없고, 면밀히 계획된 금광 운영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싸움에는 뛰어나고 내정에는 서툴다"는 것은 명확히 오해이다. (보충해서, 겐신의 연공 수입이 높을 때 추정 99만7천 석, 다케다 신겐은 추정 83만5천 석으로 최전성기 때는 100만 석이 넘는다. 경제력은 양자 모두 호각세를 이룬다.)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종언한 지도자지만, 전술적 면에서는 겐신에 미치지 못한다. (실제, 오다 군은 겐신에게 데토리가와 전투에서 완패했었다. 단 노부나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 야전에서의 전광석화로 신(神)적인 지배를 하는 데 비해, 공성전에서는 실패로 철퇴하는 일이 꽤 있다.(오다와라 성†, 우스이 성†, 가라사와 산성†등), 겐신을 전국 굴지의 전술가라 할 수는 있어도 전국 최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우에스기 겐신 부정설도 있다.
- 의(義)를 중시해서 겐신은 사리사욕으로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전국 다이묘로서 있을 수 없는 금욕적인 면은 라이 산요가 격찬했고, 현재에도 겐신이 센고쿠 다이묘 중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이다. 한편 유명무실한 간토칸레직을 계승하였다는 점부터 형식에 얽매여있는 사대주의자, 혹은 대의명분을 방패로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과 관련, 자신을 비사문천의 전생이라고 믿는 등, 자기애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 겐신은 의리가 투텁고, 약속한 일에 대한 자세는 대단히 유명해서, 호조 우지야스는 그에 관련해서 "신겐과 노부나가는 겉과 속이 항상 같지 않다, 부탁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겐신만은 보증을 선다면 백골이 되더라도 의리를 지키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속옷을 잘라서 젊은 장수의 부적으로 쓰고싶다."라고 말했다 한다. 또 다케다 신겐은 죽음에 이르러 가쓰요리에게 "겐신은 의리가 깊은 장수로 사람이 부탁하면 결코 지나치는 일은 없다. 내가 죽은 후에 겐신을 의지해라."라고 유언했다고 고요군칸†에 있다.
- 간토칸레직도 쇠퇴해버린 무로마치 막부의 직위에 계속 얽매여, 아무런 이익도 나오지 않는 간토로 출진하거나,(이것에 관해서는 최근 수 년간 연구에서 겨울철에는 비교적 다뜻한 간토로 남하해서 약탈할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 등로 본다면, 전략적인 평가는 결코 높지는 않다. 특히 후계자 결정이 되지 않았던 일로 인해 겐신 사후, 오타테의 난†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에스기 가문 측에서는 큰 손실이 되고,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겐신 시대에 획득한 북국의 대부분은 후에 시바다 가쓰이에에 의해 빼앗긴다.
묘소, 영묘
- 겐신의 유해는 갑옷을 입혀 항아리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 유해는 애시 당초 가스가 산성 아래의 린센지에 안치되었지만, 우에스기가의 전봉(영지가 바뀜)에 따라 아이즈 와카마쓰 성†, 뒤이어 요네자와 성†내로 이장되었다. 더욱이 메이지 유신†후에는 요네자와 번의 역대번주가 잠자고 있는 우에스기가의 묘소(야마가타 현 요네자와 시†)로 이장되었다. 이 외에도 가스가 산 린센지(니가타 현 조에쓰 시†)와 고야 산에도 묘가 있다. 1872년에 요네자와 성 혼마루터에 우에스기 신사†를 창건한다.
- 에도 시대에 요네자와 번 번주로 있는 가게카쓰의 가손들이 겐신을 번의 시조로 삼아 존경했고, 메이지 유신후에는 요네자와 성에 겐신의 제를 올리는 우에스기 신사가 건립되었다.
- 1908년 9월9일에는 종이위†로 추대된다.
우에스기가의 가신
호족
우에스기 25장
우에스기 겐신을 모셨던 무장들로, 특히 평가가 높은 25명을 선출되었던 것으로 1669년 막부에 제출된 †에 게재되어 있다.
우에스기 사천왕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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