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나카지마 전투(일본어: 川中島の戦い 가와나카지마노 다타카이[*]는 일본 센고쿠 시대 가이노쿠니(甲斐国)[2]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에치고노쿠니(越後国)[3]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사이에서 북시나노(北信濃)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지쿠마가와(千曲川)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인 가와나카지마[4]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개요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총 5차례, 약 12년에 걸쳐 벌어졌다. 협의적 의미로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최대 격전이 벌어진 제4차 전투(에이로쿠(永禄) 4년 9월 9일(1561년 10월 17일)[5]부터 9월 10일(1561년 10월 18일))을 가리키는..
다케다 신겐(일본어: 武田信玄 (たけだ しんげん) 무전신현[*]) 또는 다케다 하루노부(일본어: 武田晴信 (たけだ はるのぶ) 무전청신[*], 1521년 12월 1일 ~ 1573년 5월 13일)는 센고쿠 시대 무장겸 다이묘(大名). 가이노쿠니(甲斐国; 현 야마나시 현(山梨県))의 슈고(守護)이다. 법명은 신겐(일본어: 信玄 (しんげん))이고 본명은 하루노부(일본어: 晴信 (はるのぶ))이다. 관위는 종4위하(從四位下). 대선대부(大膳大夫)로 위계되었다. 가이슈고(甲斐守護)를 대대로 역임한 가이겐씨다케다가(甲斐源氏武田家)의 적자로서 태어났다. 이웃국인 시나노(信濃)를 침공,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川中島の戦い)를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가이, 시나노, 스루..
타케다 신겐은 시나노 경략(經略)에 손을 뻗친 이래 차례로 군사행동을 일으켜, 판도을 확대해 나아갔다. 연이은 침공을 유지하는 군사비는 필시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신겐시대의 재정수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GNP(국민총생산)에 대하여 군사비는 상당량 할당할 정도로 부담을 차지했다. 그래도 경탄스러운 것은 신겐은 “신겐제방”이라는 대표되는 치수, 관계사업, 군용도로 “봉도(棒道)”의 보수, 성채(城砦)의 수리, 봉화대 네트워크의 정비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적으로 추친 했다. 터무니없는 경제력이라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 가이는 말하자면, 군사대국이면서 동시에 경제대국인 것이었다. 그 국가재정의 기초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연공(年貢)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겐의 연공수납고는 얼마나 되었을..
전국 다이묘는 군단을 통솔하여 용맹 과감하게 전투를 벌이는 뛰어난 무장이 되는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사력을 지탱하는 기반은 내정에 있기에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의 추진은 곧바로 판도확대로 이어진다. 전국이라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대두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기에 그 기량은 물론 영국(領國)경영 능력의 뛰어남과 약함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그렇기에 전국시대의 군웅들은 누구래도 내정의 충실과 안정을 꾀해 부국강병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 나아갔다. 그중에서도 빛나는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했던 이가 있으니 바로 타케다 신겐이었다. 신겐의 영국경영상의 업적은 수없이 많으나 그중에서 주목받는것은 분국법(分國法)의 제정이었다. 덴분 16년(1547) 6..
가신단 전국최강의 타케다군단 - 그 무적의 메카니즘은 타케다 신겐의 명 지휘에 따라 움직였던 세상에 이름 높은 "타케다 24장(將)"을 시작으로 알려진 강력 가신단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말 중에 옛부터 이야기되는 것이 있는데, [용장밑에 약졸은 없다]라는 것이다. 용장 신겐이 조직했던 타케다 가신단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선 그 가신단의 구성과 가신단에 대한 신겐의 권력침투책을 중심적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타케다 가신단의 구성은 상당히 복잡한데, [코요군칸(甲陽軍鑑)]의 [타케다 호쇼인 신겐공 미요소닌즈우노고토(武田 法性院 信玄公 御代 人數之事)]라고 기록된 것에 의해 어느 정도 정확히 재현할 수 있었다. 가신단의 유형분류(類型分類)의 방법은 연구자에 의해 세부적으로 다소 달라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