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다이묘는 군단을 통솔하여 용맹 과감하게 전투를 벌이는 뛰어난 무장이 되는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사력을 지탱하는 기반은 내정에 있기에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의 추진은 곧바로 판도확대로 이어진다.
전국이라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대두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기에 그 기량은 물론 영국(領國)경영 능력의 뛰어남과 약함에 따라 결정되어 진다. 그렇기에 전국시대의 군웅들은 누구래도 내정의 충실과 안정을 꾀해 부국강병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 나아갔다. 그중에서도 빛나는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했던 이가 있으니 바로 타케다 신겐이었다.
신겐의 영국경영상의 업적은 수없이 많으나 그중에서 주목받는것은 분국법(分國法)의 제정이었다. 덴분 16년(1547) 6월 1일부로 공포(公布)되었던 [고슈하쯔토노시다이(甲州法度之次第)]가 그것인데, 당초에는 26조(條)로 시작하였다. 그후 증보개정을 통해 55조가 되었고, 이후 2항목이 추가되어 전부 57조가 되었다.
이 각 항목을 해설한 책은 없으나 오늘날에 있는 기본 6법(헌법, 형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에 해당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이것은 영국통치의 구체적 내용이 응축되어져 있다. 분국법은 말하자면 민정(民政)의 기본이기에, 영국경영의 밑바탕을 이룬다. 신겐은 이 치국방침을 성문화(成文化;문서화)하여 이것을 영민에 대한 지표(指標)와 행동기준을 제시해 법질서의 확립을 꾀했다.
이런 종류의 분국법은 오직 신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에, 사가미의 호죠씨는 물론, 스루가의 이마가와씨등 전국 다이묘의 다수가 제정, 공포(公布)하였을 정도로, 결코 희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선례(先例)나 습관을 성문화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슈하쯔토노시다이]에도 그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내용을 고찰하여서 다른 전국 다이묘 이상으로 내정에 심혈을 기울인 신겐의 의욕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들면, 현대의 변호사 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설치한것도 그중 하나인데, 그중에는 13세이하 범죄자의 형사책임은 면제한다 라는 유니크한 조항도 있었다. 더구나 타 가문의 분국법에는 보이지 않는 매우 특징적인 조문(條文)이 최후에 더해져 있다.[하루노부, 예의범절외의 법도이하에 있어서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귀천을 가리지 말고, 기준을 잡고, 벌을 내릴 것이니 각오하도록 하라.]
절대무이의 최고 권력자였던 신겐 스스로가 법을 존중하는 자세를 밝힌 이상, 어떤 법을 범하게 되더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고슈하쯔토노시다이]은 수많은 전국법전중에서도 걸출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 평가는 매우 높아서 이 1조만을 발췌한 것으로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엔 신겐의 순수한 이상주의(理想主義)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을 갈구하다보면 부국강병책의 완수는 어렵다. 어느정도 엄격한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고슈하쯔토노시다이]를 읽어보면 향촌의 통제에 특히 힘을 기울이었던 군주의 모습이 여실히 보여지고 있다. 지두(地頭)가 농민에 대한 부채, 질지(質地), 악전(惡錢)을 감독하고 단속하는 규정, 숨겨진 전답에 관한 규정까지도 상세히 표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가이의 국정(國情), 무엇보다 경제적기반의 약함을 고려한 것도 있기에 신겐은 엄격한 통제를 가해 농업생산을 높이고, 상공업을 일으켜, 상품유통을 활발하게 하기 위한 실효적인 시책을 차례로 진행해 나아갔다.
그중에도 특별히 주목한것은 “신겐제방(信玄堤)”이란 대표적인 관개치수(灌漑治水)사업이다.고후 분지의 서부, 카마나시(釜無)강과 미다이(御勅使)강이 합류하는 류오우(龍王)마을 부근은 고대로부터 홍수로 인하여 범람이 자주 일어나 큰 수해(水害)을 입는 곳이었다. 이 물을 다스리는 것은 가이 1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것 이었기에 양 하천의 제정(制定)은 그만큼 중요한 의의을 가지고 있기에 공사는 대규모가 아니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신겐은 이일을 훌륭히 해내었다. 착공을 시작한 것은 국주에 앉은 뒤 빠르게도 덴분 11년(1541)부터 시작했고. 완성은 에이로쿠 3년(1560). 무려 20여년에 걸쳐 진행한 장기적인 거대 프로젝트였다. 그래도 이런 난공사(難工事)을 더욱이 최대의 토목공사가 시나노 경략이후 잇따른 군사대작전과 겸행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히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정밀한 공법(工法)에 눈을 돌리면 경악의 정도는 배가된다. 그것은 현대의 최첨단의 수리토목(水利土木) 공학이론에 일치할 정도로 매우 과학적, 합리적인 공법이다. 더해서 이 치수공사는 방재(防災)상의 메리트만 있는게 아니고, 관개용수의 정비및 신전(新田)개발, 마을의 신설등에도 쓰일 정도의 다목적사업이었다.
사실 신겐은 공사가 완료된 에이로쿠 3년 제방의 근처인 류오우(龍王河原宿)을 새로이 건설하고 농민에게 은전(恩典)을 내려 이주를 시켰다. 신겐시대의 고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용왕의 강근처에 와서 새로 만든 집에 거주하면 동별역(棟別役)은 일절 면허(免許)해 주겠노라]라고 했다. 신 거주지에는 동별역(세금)의 면제를 약속해 제방의 보호관리을 맡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전의 개발에도 종사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치수공사에 부수적인 새로운 마을의 설치는 용왕하원숙 한마을에 머물르지 않았다. 그 규모는 매우 장대하여 카마나시강과 미다이강의 유역에 개전사업에 맞추어 上條新居村, 시미즈(淸水)新居村, 쯔이지(築地)신거촌, 西新新居村등의 새로운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신겐제방"는 로오우(용왕)정의 것이 유명하나 그외에도 카마나시유역의 야마가미고을(山神鄕), 후에후키강(笛吹川)근처의 만력향 같은 여러 곳이 남아 있어 농업정책에 관하여 신겐의 원대한 이상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산업진흥에 힘을 기울인 신겐
이들 치수(治水), 신전개발과 동시에 검지(檢地)의 실시도 빼놓지 말아야할 시책중 하나였다. 검지는 토지의 생산성을 파악해, 연공(年貢)의 수납고을 정하는데에 실수을 없게 하기위한 조사. 신겐은 에이로쿠 6년에 빠르게도 에린지(惠林寺)령에 검지을 실시하고, 같은 12년에는 시나노 사쿠지방에도 실시하였다.
이것은 영국전체에까진 미치지 못했으나 전국 다이묘의 검지실시예로써는 상당히 빠른 것이기에 그 선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말하면 에도후기 농정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자신의 저작 [농정본론(農政本論)]의 가운데, 신겐의 농업정책을 극찬했다.
신겐의 농정은 다른 사람에 비해 한 단계 뛰어남에 있다. 이 농정도 물론이거니와 신겐이 정치가로써 진정 위대한것은 다른 전국 다이묘가 농업을 민정의 중심으로 대한것에 비해 산악국인 가이의 국정을 파악하여, 총합 개발적인 식산흥업책(殖産興業策)을 전개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이의 임야면적은 8할에 가까울 정도로 차지하고 있다. 신겐은 이 산림자원에 착안해 치산을 추진하면서 본고장(地場)산업의 진흥을 꾀해 부국의 실을 착실히 쌓아갔다.
타국이 흉내 낼 수 없는 광산개발이 그 한 예이고, 일반목재의 하나인 미지마타(三椏;삼지닥나무)와 코우조(닥나무; 화지(和紙; 재래식 일본종이)의 원 재료), 옻(漆)나무 등을 광범위하게 식재(植栽)한 것도 특산품진흥책의 일환이었다.
화지와 옻나무가 신겐시대 가이의 대표적 특산품이었던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고, 신겐의 시책이 멋지게 결실을 맺었다고 보아진다.
신겐은 또 직인(職人;기술인)의 보호육성에 노력한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카미스키(紙漉;종이만드는 사람), 콘야(紺屋;염색자), 오케야(樋屋;통장수), 카지(鍛治;대장장이), (大工;목수), 누리시( 師;칠기장인), 다다미사시(畳刺;다다미장이), 사야시(鞘師;칼집장이), 히모노시(槍物師;창장이), 소마직(杣職;나무꾼), 이모노시(鋳物師;주물장이), 이시키리(石切;석공)등의 직인의 보호에는 각별히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 전문 기술자집단을 보호 육성함으로써 공업의 진흥을 꾀했던 것이다. 지금의 야마나시현의 특산품으로써 유명한 갑주인전(甲州印田)과 우세전(雨畑硯; 벼루), 수정가공품(水晶加工品)은 신겐시대부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려온 것이다.
물론 상업정책도 교묘해서 고후성 아래에 삼일장과 8일장이 정기적으로 열려서, 교토, 이세, 미노등의 타국의 상인의 유입도환영, 전마(傳馬)제도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활발한 상업활동이 가능한 체제로 환경을 바꾸는데 진력했다. 상품유통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저울(秤)과 되(枡)등의 도량형(度量衡)제도의 통일도 신겐의 공적이었다.
가이 특유의 고슈되(甲州枡)도 도량형통일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슈되는 4종류가 있는데, 가장 커다란 것을 카나방(鐵判;교토되의 3승(升)분에 상당)으로 이하 하타고(端子;카나방의 4분의1), 나카라(半;카나방의 8분의 1), 코나카라(小半;카나방의 16분의 1)라고 불린다. 이 독특한 도량제는 인납(籾納;벼을 납입)을 원칙으로 계량한 것으로 편리해서 신겐이 갑주되의 사용을 철저히 시켰기에 시장은 비상(非常)하게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영민도 대단히 기뻐했다.
사실 갑주되의 제도는 타케다씨 멸망후의 에도시대에도 영민의 강한 희망에 특례로써 존재가 인정받아 쇼와초기에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세제(稅制)의 통일도 영국경영의 커다란 근간을 이루었다. 세세한 세제는 별도로도 에도시대의 가이에는 “다이쇼우기리(大小切)”이라 불리는 독특의 세법이 있다. 그 시원(始原)은 신겐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전전공조(田畑貢租)을 3등분해서 그중에 3분의 2(다이키리(大切)라고 부른다)을 물납(物納), 남은 3분의 1(쇼우키리(小切)을 금납(金納)으로 하는 것이다. 이 세법은 후에 개정되어 다이키리분의 3분의 1도 급납(합계 9분의 5)으로 해도 좋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해 공정미가(公定米價)에 환산해서 납부하게 하였기에, 그렇게 희귀하지는 않았다.
다이쇼우기리법의 특이성은 쇼우기리에 있다. 소절치단(小切値段)은 에도시대을 통해 금 1량(兩)에 쌀 4석(石) 1두(斗)4승(升)이라는 환산비율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농민에게 대단히 유리한 세법이었다. 쌀의 가격은 이후에 계속 상승하였으나 환산율은 300년 가까이 일정하게 유지되었기에 실질적인 공조(貢租)부담율은 쌀의 가격에 반비례해서 절감되어갔다.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물론 대소절법을 폐지하려 했으나 가이영민의 격한 저항에 부딪쳐 갑주되과 같이 특례적으로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을 열었던 이에야스는 지배원리의 규범을 신겐의 영국경영책에서 구했었다. 그 정도로 신겐의 영국경영수완은 탁월했었던 것이다. 신겐은 정말로 당대에 걸출했던 명정치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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