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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인물관련

타케다 신겐의 경제력

타케다 신겐은 시나노 경략(經略)에 손을 뻗친 이래 차례로 군사행동을 일으켜, 판도을 확대해 나아갔다. 연이은 침공을 유지하는 군사비는 필시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신겐시대의 재정수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GNP(국민총생산)에 대하여 군사비는 상당량 할당할 정도로 부담을 차지했다.
 
  그래도 경탄스러운 것은 신겐은 “신겐제방”이라는 대표되는 치수, 관계사업, 군용도로 “봉도(棒道)”의 보수, 성채(城砦)의 수리, 봉화대 네트워크의 정비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적으로 추친 했다.
 
  터무니없는 경제력이라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 가이는 말하자면, 군사대국이면서 동시에 경제대국인 것이었다. 그 국가재정의 기초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연공(年貢)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겐의 연공수납고는 얼마나 되었을까?
 
  시대는 다를지 모르나, 케이쵸 검지(檢地; 케이쵸3년=1598년)에 의하면 신겐의 지배하에 있었던 영국일대의 석고를 유추한 결과 다음과 같은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가이 - 22만 7천석 , 시나노 - 40만 8천석, 서코우즈케 - 30만석(추정) 합계 83만 5천석 정도였고, 최 전성기일때 스루가, 톳토미, 미카
와, 미노, 히다, 엣츄의 일부을 세력권에 넣었을때는 100만석은 넘었을 거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총 석고에서 가신의 영지분과 사찰과
신사의 영지분을 제외하고 남은 것중 3분의 1 정도가 신겐의 실질적인 수입이었다.
 
  동시에 신겐과 더불어 관동의 패권을 다투었던 우에스기 켄신과 호죠 우지야스의 총 석고를 케이쵸 검지로부터 추측해 내면
우에스기 켄신은
에치고 - 39만석, 엣츄 - 38만석, 노토 - 22만석, 사도 - 1만 7천석 합하여 99만 7천석
호죠 우지야스는사가미 - 19만 4천석, 무사시 - 66만 7천석, 이즈 - 6만 7천석 합하여 93만석이었다.
 
석고를 보더라도 세 사람은 큰차이는 없었다. 신겐은 어떻게 해서 이것을 리드할 수 있었을까.
 
  물론 전국시대에는 실고제(實高制)->토지과세액을 전고(錢高)=>관문(貫文)으로 환산하여 그 세액으로 지적(地積)을 표시하던 방식) 을 채용했었기에 지역편차를 고려하여 석고제(石高制;지적을 생산고로 표시하던 방식)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무리가 있으나 신겐의 경제력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었다.
 
요컨대 신겐의 재정기반은 다른 유력 전국다이묘와 비교해보더라도 결코 손색이 없을정도로 꽤 강대하고 견고했다. 아무리 봐도 대단 하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겐의 본거지 가이(甲斐)는 일반에게는 경지면적이 좁아 쌀도 10분에는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산국(山國)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실제로는 농업의 생산성은 의외로 높았다고 한다.
 
  케이쵸 6년(1601)의 일국 검지(一國檢地)의 석성(石盛)을 보면 전국평균의 2-3할정도 높게 평가되어 있었다.
[전원유설(田園類說)]이라는 서책에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는데, [ 가이는 배(梨), 부토(포도), 밤(栗), 감나무(柿), 목면(木綿;무명), 연초(煙草;담배), 누에(蚕)등의 특수농산물과 이모작(二毛作)의 수입이 있었다]라고 의를을 설명하였다.
 
  다른 전국다이묘가 쌀 중시의 농업정책을 중시한 것에 대해 신겐은 국정을 십분 파악하여 산악자원과 전작(畑作)에도 왕성한 의욕을 보이며, 정책을 추진해 나아갔다고 한다. 전국평균보다 2-3할이 높은 생산성은 바로 이 성과의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쌀의 생산고는 국력을 꾀하는 하나의 목표는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겐의 경제력은 석고에만 있지 않고, 환금성(換金性)이 높은 특수농산물과 특산품의 생산고 등도 가미하여 총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하여간 신겐이 전개했던 자원개발책은 당연, 재정기반의 확립을 의도한 것에 있어, 그만큼 연공의 수입에도 매우 엄격하게 행하였다. 
말하자면 [코우슈하쯔토노시다이(甲州法度之次第)]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눈에 보인다.
 
[백성, 연공을 압류(; 체납을 말하는게 아닐까?!)하는 일은 죄가 가볍지 않다. ]
  이처럼 연공체납(年貢滞納)에는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을 표시하고, 더욱이 연대책임제을 실행해 미납자나 도망자가 생길시에는 관계자에게 변제납입을 시켰다.
 
  더해서 신겐이 부과했던 세(稅)의 종류는 여러대명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그 징세체계는 불분명한 부분도 많았으나 일반적인 본연공
(本年貢;세금), 공사(公事;연공이외의 잡세(雜稅), 동별제역(棟別諸役;한 가구당 부담하던 제역)의  다음과 같은 세목이 있었다.
지두역(地頭役)/대관역(代官役)/전지역(田地役)-전지제역(田地諸役)/덕역(德役)/고우나미(鄕次)의 보수역/벌전이부역(罰錢利部役)/
동별전(棟別錢)/진부(陣夫)/압립부(押立夫)/산구전(山口錢)/시역(市役)/관역(關役;목호역(木戶役)/상매(商買)의 역(役)/공직(工職)의
역/승려처대역(僧侶妻帶役)/어인판(御印判)/포역(布役)/건역(鍵役)/창역(窓役)/수목역(樹木役)/죽노연공(竹ノ年貢)/염역(鹽役)/후가
역(後家役)
 
  과세내용의 설명은 생략하지만, 이렇게 세의 종류가 많은 것은 신겐이 화폐에 대한 세수의 증대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자세는 자칫하면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피해는 감수한다는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의 이미지를 갖게 될 수도 있는데, 실제는 그렇지는 않다. 특정의 영민에게 세부담이 집중하지 않기 위해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넓으나 낮은 세금징수을 하는데, 고심하였다.
 
 
하지만 타국에 비해 상당히 세율이 높은 품목도 있다. 동별전이 그것인데, 1집에 200문(文)을 봄, 가을 2번에 걸쳐 징수했다. 금전감각이 지금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오슈(奧州)의 다테씨(伊達氏)가 100문, 호죠씨의 50문(35문까지 멸세되었다고 한다.)에 비하자면 상당히 고세율일 수밖에 없었다.
 
  동별전은 말하자면 가옥세. 영국의 모든 가옥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큰 수입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징수는 엄격해서, 도망자가 나오면 철저히 추적해서 받아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정도로 가혹할 수밖에 없는 징세을 계속해 나간다면 영민들 사이에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
더해서 당시는 병농분리가 아직은 진행중에 있기에, 매년 군사행동에는 농민도 병사로써 종군할 수밖에 없어 염전(厭戰;전쟁을 싫어하는)기분도 만연했다.
  그래서 신겐은 이러한 행위의 대상(代償)으로써 이 동별전을 면제하는 것으로 무민책(撫民策)을 자주 시행했다.
동별전 이외에도 특별한 부담에 대하여 제역을 면제해 주는 예가 많았다. 공조부담율이 농민에게 유리한 "대소절법의 세법"의 채용도 무민정책의 한가지였다.
  이러한 무민정책은 결과적으로는 세징수의 효율화와 증수(增收)에 있다. 신겐은 당근과 채찍을 유효하게 사용함으로써, 재원의 안정 확보을 이룰 수 있었다.
 
 
  신겐은 또 금산(金山)의 개발, 경영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치열한 전국의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 천하에 패권을 주장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군자금의 획득에 광분하는 것은 누구라도 당연한 것이고 신겐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중금정책(重金政策)을 진행했다.
 
  물론 신겐시대의 유통화폐는 영락통보(永樂通寶)등의 동전(銅錢)이 기본이었고, "갑주금(甲州金)"이라 불리던 금화는 군용금(軍用金)으로써의 의미가 더 강해 시중에는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화폐로 불리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판금(板金)이나 금괴(金塊), 지금괴(地金塊)라는 감각으로 받아들이는게 좋을것 같다.
 
  따라서 그 이용방법도 전공에 대한 은상, 사사(寺社)에 대한 기부, 군사물자의 대량조달, 외교정책상의 매수(買收), 조략(調略)등이 메인이었다.
  일례로 [코요군칸(甲陽軍監)]에서는 에이로쿠(永祿) 5년 무사시(武藏) 마쓰야마성(松山城)을 공격해 전공을 세운 河原傳兵衛란 자에게 "고이시금(碁石金;갑주금의 일종)"을 신겐이 직접 손에 3스쿠이(すくい;갯수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됨) 내려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이시금 1개는 대략 1량(兩)분에 해당한다. 1스쿠이는 약 10개로써 3스쿠이 라는것은 그러니깐 대충 30량의 포미(褒美)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의 금액이긴 하나, 상당한 거액이라는 것은 이것을 통해 확인되는바, 신겐의 군용금의 윤택함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이 고슈금의 채굴이 시작되었던 것은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 시대부터였고, 신겐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중에 신겐 지배하의대표적인 금산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쿠로카와야마(黑川山),코가네카와(黃金澤)
-御座石山, 카네자와금산(金澤金山)-코쯔케이야마(黑桂山), 保山, 雨畑山-유노오쿠(湯之奧), 카와지리야마(川尻山)-카와바타(川  下), 梓山-후지(富土),  金山
 
  그밖에 가이지방에서는 栃代山, 金山嶺, 토키와산(常盤山), 御嶽金山, 시나노 지방에는 마지노(眞志野), 금계산(金鷄山), 시비라(芝平), 우시로야마(後山)금산등도 신겐이 손을 뻗쳤던 금은산(金銀山)으로써 알려져 있다.
 
  이런 금산에서 나온 막대한 황금이 신겐이 차례로 일으킨 군사작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고슈금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국의 화폐경제사상, 희귀한 예로써 높은 위치에 점하고 있으면서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았다.
  신겐의 금산경영에 대해서도, 극비정책하에 있어 군사기밀과 같이 두터운 베일에 가려져 있었기에 그 규모와 산출량, 정련기술등은 정확하게 지금까지 알 수가 없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데이터가 있긴 하나 에이로쿠 연간(年間)의 끝날 때쯤 타케다 영지에 들어가게 된 오 미카와(奧三河)의 쯔구금산(津具金山)에서 신겐이 24만량에 달하는 황금을 채굴했다는 지방전승(地方傳承)이 남겨져 있는 정도였다.
 
  얼마후 케이쵸(慶長) 3년(1598)의 데이터에 의하면 사도(佐渡) 금산의 연간 금 생산량은 약 7995량(兩)이라고 하였다. 쯔구금산에 전해지는 전승의 허실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야기의 절반, 아니 10분의 1 정도가 정확한 숫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느쪽이든, 신겐이 다수의 금산을 차지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황금으로 군사재정을 지탱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국 다이묘가 타국으로의 침공은 판도확대와 더불어 황금의 획득을 의도하는것이기에 신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신겐과 켄신의 시나노, 에치고 국경에서 자주 충돌한 것도 사실은 우에다 지방의 광산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것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 진위가 어쨌든 신겐이 강력한 재원으로 있던 금은산의 개발, 경영에 이상할정도로 정열을 기울였고, 그것이 실제인지 쫓아가 보더라도 흔들림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