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겐신(일본어: 上杉謙信 (うえすぎ けんしん), 1530년 음력 1월 21일(2월 18일)~1578년 음력 3월 13일(4월 19일))은 센고쿠 시대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출가 전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일본어: 長尾景虎 (ながお かげとら))이고, 이후 개명을 통해 우에스기 마사토라(일본어: 上杉政虎 (うえすぎ まさとら)), 우에스기 데루토라(일본어: 上杉輝虎 (うえすぎ てるとら))란 이름을 가졌고, 출가 후엔 우에스기 겐신으로 불렸다. 어릴 적 이름은 도라치요이다. 형을 대신하여 당주에 자리에 앉아 주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의 쟁쟁한 센고쿠 다이묘들과 전쟁을 벌였다. 스스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라 믿어 전장에서 뛰어난 군략을 보..
가와나카지마 전투(일본어: 川中島の戦い 가와나카지마노 다타카이[*]는 일본 센고쿠 시대 가이노쿠니(甲斐国)[2]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에치고노쿠니(越後国)[3]의 센고쿠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사이에서 북시나노(北信濃)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지쿠마가와(千曲川)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인 가와나카지마[4]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개요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총 5차례, 약 12년에 걸쳐 벌어졌다. 협의적 의미로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최대 격전이 벌어진 제4차 전투(에이로쿠(永禄) 4년 9월 9일(1561년 10월 17일)[5]부터 9월 10일(1561년 10월 18일))을 가리키는..
덴쇼6년 (1578) 겐신이 죽었을때 가스가 산성에 모두 합쳐서 2만7천여의 금이 모아져있다고 한다. 이 즈음 금 1냥은 錢 3관 정도로 쌀로 환산하면 3-5석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만칠천냥은 錢 팔만천관 쌀 8~14만석이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평가할까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예를 들면 경장3년 (1598)년 에 토요토미씨가 전국 금광에서 운반시킨 금 총액이 약 삼만사천냥 그중 우에스키 가게가츠가 운반한 분량이약 이만냥이라는 기록이있다. 또 겐신의 부친 다메카게때 쿄료쿠2년 1529년 영국 재정규모는 연간 칠천오백貫그럼에도 300貫이 적자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정도 신용할수 있는 숫자인가 명확하지 않지만 어쨋든 겐신이 상당한 금액을 모아두고 있다는것은 틀림이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매년 같이 ..
순수한 윤리관과 올곧은 행동 " 나머지 인간 " 겐신 전국시대 주인공들은 어떻게 한 셈인지 모두 유년기 시절이 박복하다 신겐도 마사무네도 노부나가도 그리고 겐신도 똑 같다. 특히 육친의 관계가 냉담했다. 부자사이, 모자사이,형제사이.누이와 동생사이 관계가 각각이 주인공에 따라 경우는 달랐지만 그다지 행복한 성장기 교육형태을 얻지 못했다. 신겐은 부친 노부토라에게 소외당하고 있고, 또 마사무네는 어머니에게 소외당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부하 모든 관계자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다. 또 친족인들이 서로 싫어하는 일이다. 겐신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그는 1530년 1월21일 에치고 슈고다이의 막내로 에치고 지방에서 태어났다. 태어난것은 가스가 산성이라고도 미다테 성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에치고 호족의 딸이었지..
겐신의 정신구조 - 佛門과 센코쿠 다이묘사이에 동요하는 마음 겐신이 관동에 출진했을때의 일이다. 常陸 지방의 4家가 小田天庵의 난폭함에 고통받던 끝에 天庵을 물리쳐 준다면 자신들의 일당은 전원 겐신의 家來가 되겠습니다라고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겐신은 물건에 메다는데 사용하느것 같은 종이조각에다가 [ 八幡可參候 ]라고 써서 사자에게 전한다. 사자는 급히 돌아가서 그 종이조각을 주인에게 건냈지만, 4家주변에 도달해가기전에 이미 겐신군의 선진이 도착해서 눈깜빡하는 순간에 성을 격파했다 - 라고 한다. 도와주세요라고 요청하면 [ 八幡이 간다.] 라고 응한점이다. 겐신의 행동력을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일화이다. 이 경우 八幡은 군신을 의미하지만 결코 비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스스로를 神佛과 함께하는 무장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