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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인물관련

역사군상(우에스기 겐신) 겐신의 경제기반

덴쇼6년 (1578) 겐신이 죽었을때 가스가 산성에 모두 합쳐서 2만7천여의 금이 모아져있다고 한다. 이 즈음 금 1냥은 錢 3관 정도로 쌀로 환산하면 3-5석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만칠천냥은 錢 팔만천관  쌀 8~14만석이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평가할까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예를 들면 경장3년 (1598)년 에 토요토미씨가 전국 금광에서 운반시킨 금 총액이 약 삼만사천냥 그중 우에스키 가게가츠가 운반한 분량이약 이만냥이라는 기록이있다.

  또 겐신의 부친 다메카게때 쿄료쿠2년 1529년 영국 재정규모는 연간 칠천오백貫그럼에도 300貫이 적자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정도 신용할수 있는 숫자인가 명확하지 않지만 어쨋든 겐신이 상당한 금액을 모아두고 있다는것은 틀림이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매년 같이 되풀이 된 군사행동을 경제적으로 지탱한 것도 당연하다 생각된다. 그것은 겐신은 어떻게 해서 이 막대한 금액을 모아둔것인가? 모아둔 금의 존재를 기록한 사료는 그 내역을 [御利平 의 金]다시 말하면 대부이익 [카이긴] 다시말하면 구입한것 [여기저기로부터 參金] 다시말하면 상납시킨것 3개로 분류한 것이다.

 이때문에 상납금과 구입금 대부해서 증가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大名에의한 금융활동은 뭐니해도 히노미도코를 연상시켜 흥미스럽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태불명이다. 그것은 그 종자돈을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을까? 그것은 라이벌 신겐처럼 금광경영에 의한 것이 아닌것만은 확실한것이다.

 그러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유명한 佐渡금광의 개발은 가케가츠 시기 이후이고, 원래 겐신은 佐渡를 영지로 만들지 않았다.  에치고  이와후네군, 우오누마군 등 금광이 있다고 되어있지만 겐신의 시대에 어느정도 채굴이 행해졌는지 완전히 모른다.

오히려 직할령인 표소로부터 모여진 年貢 ,段錢,여러 役錢 등 조세를 환금한것 또 상인등에게 상납시킨 금을 종자돈으로 한것이라 생각하는 쪽이 현실에 가깝다.

 料所 지배

그래서 지금부터 겐신의 료소지배, 유통통제등의 경제 정책을 들여다 보도록하자 당시 뭐니해도 농업사회이기 때문에 전국대명의  주요 경제기반은 농촌이었다.

 대명이 농촌에서 수중에 넣은 富는 료소로부터 연공과 영국내 경작지에 일률적으로 가한 段錢등 조세에와는 크게 구별한다. 이중 우선 료소에 대해 알아보자. 겐신의 료소는 기본적으로 무로마치시대 우에스키씨의 그것을 이은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우에스키씨는 남북조 전란중에 여태껏 슈고, 國司를 겸한 닛다씨를 쫒아내고 어치고로 들어와 국내 코쿠카료우(제도적으로 율령체제이래 국유지)를 자신의 것으로 했다.

 이코쿠카료우는 슈고 우에스기와 칸레 우에스키가 로 이분된다. 전자는 타메가게의 하극상에 의해 실권을 뺏앗겨 후자는 권력탈환을 노리다가 아키자네가 다메가게에의해 패사한 후로 호죠에 쫒겨난 노리마사가 겐신에게 보호를 청해 에치고로 도주 우에스키 가명을 양도했기 때문에 결국 전체가 겐신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겐신의 코쿠료도우는 어떤 것일까 장원이 xx 장 이라고 불리는 것에 비해 쿄쿠료도우는 xx保 혹은 xx鄕 이라고 불리는 것이 많아서 실마리로 살펴보면 율령시대이래 국정이 있었던 府內 주변 쿠비키 지방에 집중 카리와, 우오누마, 칸보라어토 곳곳에 있어서 가장 오지 巖船지방에는 거의 없는 것을 알고 또 그와는 별도로 우오누미군의 쯔마리 와 上田莊이 간레이(관령)우에스키가의 영지이다. 더욱이 이러한 지역거점으로서 수호령을 통해 料所화한 장원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은 무로마치시절 우에스키료소의 분포개요이다.

   북 칸바부라에서 巖船지방에 걸쳐서는 아카기타衆이라는 독자성장한 國人衆의 본거지여서  훗날 카케가츠시대에도 거의 료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 점은 가게카츠시절 거의 料所가 설치되어있던 쿠비키와는 대조적이다.겐신시대 료소를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이것등으로 본다면 기본적 짜임새는 이전 시대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만으로 본다면 겐신의 료소지배는 슈고 우에스키씨 시절과 완전하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것도 아니다.이전에 서술했던 지역모두가 우에스키의 료소로서 완전히 지배되고 있을 리는 없기때문이다.우에스기는 그 일부를 일족이랑 被官(대대로 대명혹은 어가인- 지방에사는 쇼군 직속 가신 - 의 가신)에게 부여  또 그들에게 료소 관리를 맡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은 수호代이고 郡代에도 되어있는 나가오(長尾)씨 일족이었다. 그들은 그 지위를 이용해서 료소의 사유화를 꾀하고 있었다.

 가령 고시지방 郡代인 나가오 타카가게는 메오우 4년 (1495) 자식 후사가게에게 슈고의 料所를 일괄상속시켜 같은 시기 료소 연공중 100貫文을 새롭게 恩給地로 얻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규제를 가하기 위해 그 당시 슈고였던 후사요시는 메이오우7년(1498)료소 불입(슈고의 관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것)을 파기하는 대담한 정책을 내놓는다.즉 여태껏 자신의 직할지에 자신의 수하가 못 들어가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기묘한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것이 당시 실태였다. 그러나 이러한정책은 강한 반발을 초래 후사요시는 영정4년(1507) 후일 겐신의 親父 다메카게에의해 살해당해 버린다.

  때문에 겐신은 료소지배의 안정화를 위해 일족등에대한 통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된것이다. 천문의 난은 실로 이때문에  생긴 고통이었다고 할것이다. 이 반란을  거치면서 겐신은 죠죠 사다노리를 비롯한 슈고 우에스키씨 일족의 세력을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고시 나가오씨를 스스로 통제아래 두는 것에 성공했다.

 더욱이 최대 라이벌 나가오 마사가게가 에이로쿠 7년(1564)사망한 것을 계기로 그 아들 키헤이지(후일 우에스키 가케가츠)를 양자로 떠 맡아 대신해서 (譜代-대대로 나가오씨를 섬긴가신)가신 구로가네씨를 우오누마 郡代로 사카토 성에 파견 上田 나가오씨를 완전 복속시킨다. 이것에 의해 겐신은 관동침공에 거점도 확보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렇게 확보한 료소를 어떤 방식으로 지배했을까는 잘알려져 있지 않았다.

  후일 가케가츠시대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1村 단위등으로 정리해서 설정된 료소에는 代官이 배치되었다.가신에게 준 토지와 섞여서 영세한 규모로 설정된 료소는 中使라고하는 村관리가 촌 전체를 관리해 그것을 지역 지배의 거점으로하는 방지로 라는 城將이 통솔하고 있다. 겐신시대에 이런 체제가  어느정도 정비되었는가는 잘모르지만, 중요한 문제는 결국 지역지배 담당자가 어느만큼 충실한인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겐신은 전에 서술한 노력을 한셈이지만, 그 결과 직접 지배지는 쿠바키지방, 본래 출신지인 산죠지방, 譜代가신들의 영지를 모두 몰아선 우오누마지방 등에서는 그런대로 안정적인 지배를 한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지역에따라 재지상황의 장악도 진행시켜나갔다. 심복부하인 야마요시씨의 영지는 토지검사를 실시한 결과가 남아 있다.

  그것에 의하면 段當리(段 9.92 제곱미터)年貢은 일률로 700文이고 그럼에도 거의 토지에서 최고 1.5배에 달하는 증가분을 명확하게 내세우고 있다. 재지장악이 가장 잘 진행되었다는 호죠씨 영국에서도 段當리 年貢高 500文으로 규정되있기 때문에 700文이라는 것은 아주 높다고 할수있다.

 토지 생산성의 격차가 있다는 것으로 본다면 年貢高 일률정하는 것은 부담능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만은 않는다고도 생각되지만, 동시에 부과 대상자의 면적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토지에서 얻어낼수 있는 잉여분의 거의를 年貢高로서 잡을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수 있다.

 가신들의 給地에서 조차그러하다면 료소에 있어서 재지장악도가 높다는 것을 쉽게 상정할수있을 것이다라고 해도 이것이 거점지역에 있는 료소라고 하는 한정성을 가진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두가지를 보면 여태껏 소개한 사례는 모두 그런것처럼 전국시대 에치고에서 연공고는 거의 貫貢高로 표시하고 있다 그것이 실제 연공이 돈으로 납부되고 있는 것, 따라서 상품경제 발달에 의해 농민의 화폐 입수가 쉬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가는 잘 모르겠다라는 것은 영주가 직접손으로 작성한 分이 관문고를 표시된 경우도 많이 있어 그 숫자가 군역부담등의 기본가치이고, 연공수납의 실태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이라고도 생각되기때문이다.

   지행고가 관문고로 표시되면서 실제 연공수납이 쌀로 행해졌다고하는 사례는 지방 영국에서 자주보인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가케카츠 시대가 와서 石高制가 도입되면서 年貢은 돈으로 납부에서 쌀로 납부하는 것으로 변한다고 상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유통기구는 대혼란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겐신시대에도 연공이 많은 부분을 쌀이납입되고 있다고 생각될 만할것이다.

 段錢 징수 - 직할령을 웃도는 면적으로부터 얻어지는 세금, 그것은 아주 큰 것이었다.

다음은  段錢에 관해서 그것은 원래 덴토의 즉위, 덴노가  사는 궁전의 건설,임시의 국가적 행사 비용으로서 전국에 일률적으로 부과되고 있는것으로,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 슈고가 자신의 수입으로서 특별하게 이유도 없이 매년 징수하게 된것이다.

이때문에 [一年平均役] (에치고등 지방전체에 한결같이 부담된 조세적부담) 센코쿠 시기 에치고에서 두 종류의 段錢이 부과되고 있었다. 하나는 막부이 여러비용조달을 위한 돈으로 公田이라불리는 장원제 이래 年貢 ,段錢 부과 대상으로 등록된 토지에 대해 부과되었다.  

이것은 에치고 특히 겐신의 부친 다메카게의 쿄토에 대한 특수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요했지만, 본 서술의 테마로 본다면 이 이상의 관계를 갖는다.

이제 하나는 다이묘의 재원으로서 段錢이다. 그 징수를 위해서, 우에스기 시절부터 [段錢帳]이라는 토지 대장이 작성되었다. 여기에 料所대장만아니라, 阿賀北衆등 지방무사의 토지도 등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기준면적은 검지(토지를 측량/검사)등을 통해 장악이 되어가서 종래의 公田면적을 몇배나 웃도는 것이다. 段錢액수는 반드시도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경우는 토지당 100文이었다. 때문에 연공에 비하면, 적은 액수처럼 보이지만, 부과 대상이 전 영토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 비중은 아주 컷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슈고 우에스기씨는 영지의 재정관장 기관인 [公錢方]안에 [段錢所] 를 설치해서 부과,수취를 담당하게 하고 있다. 또 현지에서 각 영주로 부터 段錢을 징수하는 것은 각 郡의 郡司의 역할이었다. 겐신은 부친에게 배워 이러한 체제를 계승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실상은 사료로부터 알수없다.

 이처럼 겐신은 料所 지배와 段錢징수에 임을 기울여 財原이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노력했다고 전해졌지만, 그 실상은 잘알려져있지 않다.그 때문에 전후 시대에서 추정에 의지하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자료가 없었기 때문일까 실로 겐신이 그 방면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인가는 단정할수 없다. 어찌되었든 겐신 자신의 경제정책이 명확하게 알수 있는 것은 도시,유통통제의 방면에서이다.

靑苧(아오소) - 유통경제

 -상품유통을 장악한 겐신은 점점 그 힘을 축척하고 있었다.

중세의 에치고라면 도시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일본속의 농촌지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운이 교통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당시 에치고는 동해 해운,琵琶호수 수운을 통해서 교토와 물적 , 인적 교류가 융성했다. 說敎節 [山?太夫]만 아니라 료쿄쿠등 여러가지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나오에쯔는 엣부터 널리 도시로 알려진 항구였다. 쵸우쿄우2년 (1488)에 방문한 시인인 승려 방리쇼쿠 [하이에 무진죠]로 [민호3천 시장面 萬棚 ...]이라고 읊었듯이 대 상업 항구도시였다.

  이들의 항에서 쌓이게 된 물건에는 물론 쌀도 있을 것이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에치고 布 라고 불리는 마포와 그 원료인 靑芋 (모시라는 식물의 껍질을 얇게 자른것으로 마 계통의 원료이다. )현재도 모찌야찌지 등의 특산품으로 유명하지만, 목면이 보급되지 않는 중세에 있어서는, 마는 비단과 나란히 특히 서민에게 있어서 빠질수 없는 중요한 의복원료로 그 수요는 압도적으로 컷다.

  이미 가마쿠라 막부 시절 미나모토 요리아키는 쇼군 임명의 칙사에게 [越布千端]을 선물하고 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기내 상인이 아오소 좌를 결성하여 아오소의 구입이 활발한 에치고로 가서, 기내랑 서쪽 지방에 팔아 치우고 있다.

이러한 상품 유통에 대해 지방 권력이 통제에 착수한 것은 무로마치막부의 전국지배가 쇠퇴해서, 또  지방상인이 태두해 오는 전국시대의 일이다.

  메이오3년 (1494) 에치고 슈고 上杉房定은 지방경계의 관소에서 關錢징수를 가리와郡 야스다의 毛利中廣에게 맡새삼스레 맡기고 있다.그 내용을 보면 靑苧(아오소),포,종이,철을 실은 말에게 20文, 쌀,콩,소금,소금절인생선을 실은 말은 1필당 10文의 관전을 징수하도록 정했다.

이것에 대해 靑苧(아오소)의 판매 구입을 독점해온 세쯔덴노우의 좌 상인이 이전에 납입하지 않아서, 소송을 통해서 저항을 했지만, 우에스기씨는 전연 인정하지 않고,도리어 징계를 가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중앙의 좌 상인의 특권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그 배경에는 에치고 상인이 독자 활동을 하게 된것이다. 게이오 7년 (1498)에는 靑苧(아오소)라 생각되는 에치고 상인의 물건이 近江 坂本에서 압류했다.

享祿(1529)에는 靑苧(아오소)를 수송하는 에치고 배가 노도에서 억류당했다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그 처럼 靑苧(아오소)거래를 중앙상인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에스기씨도 상인을 보호 , 통제아래 두기 위해, 구로다 고로자에몬 이라는 어용상인에게 에치고 아오소좌를 결성시켜 국내거래관한 영업세 징수를 담당하게 했다. (오히려 구로다 씨는 교토 아오소 座 본소인 삼죠니시가에 에게 영업세를 납입하여 기나이[畿內] 에서 에치고 상인의 활동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우에스기씨는 더욱이 우오노 강과 시라노 강을 물자 운반하는 배로 통행권리 면허를 통해 관리 통제 아래 두고 있다.

 육로 교통에 있어서도 상인의 안전을 위해 다이묘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같이 다이묘는 서서히 교통/유통 통제를 강화해 나간것이다.

  겐신의 교통지배

- 물자의 수송체제를 통제 강화해서 , 군대 이동을 원활하게 하였다

國主의 지위를 이은 겐신이 맨 먼저 씨름한것은 교통정비, 요충지배였다. 이것은 유통통제 및 통행세 징수를 목적으로 한것은 물론이지만, 이것만 아니라 군대의 신속한 이동과 적으로부터의 방위때문이기도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天文18년(1549)에는 나이부 關川에 있는 큰 다리가 크게 망가진것을 壓田定賢에게 수리시켜 다리세 징수를 담당하게 했다. 天文20년 에는 大串某에게 阿賀理川, 信濃川 하구의 나루에 代官 직위를 부여 , 上分의 납부의무를 지웠다.

  이 산죠 나루는 향록,천문의 난에 阿賀北衆(에치고 북쪽 지방에있는 슈고다이 나가오가에 대해 독립성이 강한 지방호족)이 침입할 때 , 도하지점이었고, 에치고 북부와 중부와 교통이 잦은 요충지였다.  외부로 진출이 본격화와 동시에 도로의 수리, 戰馬등 제도제제 강화가 시도 되었다. 특히 관동 침공의 통로에 해당하는 魚沼지방이 중시되었다.

  이때문에 長尾 政景에게 몇번이나 산길등의 수리가 명해져 上田성 아래의 町을 통하는 것 없이 군대가 이동할수 있게 바이패스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 이다.  戰馬宿送(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될지 .. 그냥 원문을 씁니다. )의 부역은 가신,농민,町人에게 널리 부과되었다. 가신이 郡司不入(대명권력의 영내 침입 면제 , 그내용으로는 경찰권력, 段錢부과권등등) - 번역자 註[막부가 인정한 지방호족이 슈고권력의 침투를 거부할수 있는 권리.. -守護使 不入-  전국시대에 막부가 쇠퇴하고 슈고다이묘에서 센코쿠 다이묘로 시대가 바뀌고 지방호족,무사에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가신단화가 진행되면서 부인되었다.  中公문고 일본의 역사11권 전국대명편 대명과 가법편에서 가신단의 통제 강화와 맞물려 법이 어떻게 성립되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을 인정받거나,町人이 조세와 지대면제를 면제받은 경우라도 戰馬宿送의 부역만은 담당하게 했다.

 이 역할은 도시에서 도매점포등 유력한 町인을 통해 농촌에서는 촌을 단위로  부과되었기때문에  다이묘 권력의 지역장악상에도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겐신의 도시지배 - 황금의 비밀은 다른 지방과 교역, 특히 大森은광과 교역에 있었다.

 겐신이 경제정책에서 가장 노력을 기울인것은 도시의 진흥 및 장악을 통한 유통지배의 강화였다.永綠3년(1560) 겐신은 자기 세력아래 府內를 料所화 함으로써 町인에게 대해 향후 5년간 여러 부역등의 면제를 약속했다. 그 이유를 겐신이 町인의 곤궁한 것을  불쌍히 여겨 , 번영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본격적인 간토 침공을 위해서 물자조달 , 성아래 町 방위체제를 확립을 지향한 것이라 말할수 있겠다. 이것에 근거하여 우선은 부내에 있는 사원령지, 급인정이 町인의 토지와 교환되었다.

두번째는 船頭부역, 田세,酒세,馬房세등이 면제 되었다. 이것은 다른지방에서 배가 안심하고 출입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지방에서 상인이 이 화물의 운송료/세금으로 곤란을 격어서이다.  이 처럼 여러 부역 면제를 통해 배와 말로 수송되는 화물의 출입을 융성하게 해서 , 다른지방에서 물자랑 상인의 유입을 활성하게 하는 것으로, 이조치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유입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출품의  중심인 아오소 (靑芋)에 관해서는 세금을 징수해서 유입되는 돈의 일부를 흡수한 것이다. 그리고 어용상인인 藏田五郞佐衛門을 대관으로 임명하여 상인을 관할하게 했다.

 수입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은 무기의 원료가 되는 철이다. 이것이 어느곳에서 운반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선 생각해 낼수 있는 곳은 사철의 산지인 山陰지방이다. 이즈모 (出雲)의 우롱포는 山陰의 주요하게 실어나가고 들어가는 항구중 하나로, 그곳에 출입하는 배로 수송되는 철에 세금이 부여되 있다. 그 가운데는  北國船(홑코쿠부네)도 있다.  이 배가 直江津에 철을 운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 흥미깊은 것은 宇瀧浦에는 쌀을 운반해온 배가 도착해서 상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에치고의 쌀과 이즈모의 철의 교역 더욱이 범위를 넓히자면 石見 溫泉津(이와미 유노즈)에서 大森은광과 은 교역이 있는 지도 모른다.

 광산에서 쌀의 수요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망상이라고 말할수 없고, 그렇다고 한다면 겐신 황금의 비밀에도 한 걸음 다가갈수 있지만, 억측은 이쯤해서 멈추자. 어쨋든 연공미 일부가 수출품으로 교역통로를 타고 여러가지 부를 에치고로 가져온 것은 확실하다.

 이런것에 관한 문제지만, 우에스키씨는 쿄토에 대관으로 神余(가나마리)씨를 두었고, 막부와 아오소본소인 산죠니시가등과 절충을 담당하게 했다. 爲景은 이 가나마리씨를 통해 당직물등 고급 수공예 제품을 구해서 막부관리에게도 필수품 조달의 편리를 받고 있다.

겐신이 조총의 화역조합방법을 기록한 책을 쇼군에게서 선물받은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겐신도 神余(가나마리)씨를 통해 기나이 에서 에치고로 입수할수 없는 물자를 조달했을 것이라는 것을 첨부해둔다.

겐신의 도시 및 항만지배는 柏崎 에도 미친다. 1564년 겐신은 柏崎에 制札(금지사항을 적어 길가/사찰 경내에 세운 푯말)을 내린다. 여기서 상거래를 위해 출입하는 우마의 화물에 관해서는 , 가까이에서는 새로운 부역/세금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전란등에 의해 곳곳에 도망한 체 돌아오지 않는 町인은  즉시 돌아올것을 명령하고 피난처 영주가 돌아오는 것을 막아 늦어지는 것이라면 사람의 명부를 첨부해서 신고할게 했다. 町에 관해서는 도적, 방화등을 고발하게 하고, 행패부리는 난폭한 자의 명부를 제출, 단속을 명령하는 등 町人을 통한 치안 유지체제를 꾀했다.

 여기서 강하게 권력을 발동해 근처 영주를 억압하고  물자 / 상인을 지배아래 있는 도시로 집중시키게 하려는 겐신의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인가는 동일한 制札로 아오소 (靑芋)세금을 엄중하게 징수한 것으로도 분명하다.

이렇게서 겐신은 지역경제 발달을 경유 , 유통통제를 강화해서 자기의 지배 아래 있는 주요한 도시에 사람과 물자가 집중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서

  물자조달을 쉽게 하는 것과 동시에 여러가지 부역부과를 통해 그곳에 모여든 부의 흡수를 노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