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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시대 인물관련

조선시대 가장 위대했던 성군 세종 "世宗, 1418 ~ 1450"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이다. 성은 이(李), 는 도(祹), 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3년간의 연구 끝에 1443년 한글을 창제했고, 오늘날 10월 9일한글날로 정해졌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보여 자격루, 물시계등의 개발을 전폭 지원했고, 장영실(蔣英實), 최해산(崔海山)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1만 원권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생애 초기

출생과 왕자 책봉


이도는 1397년 당시 정안대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대군이 왕세제(王世第)가 되면서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卞季良)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왕자 책봉과 형들과의 경쟁

둘째 형 효령대군

 

1413년 17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은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양녕대군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과 즉위


그 뒤 1418년에 태종이 맏형이자 동복형인 양녕대군을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해 6월 22살의 그를 새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광주로 내쳐지게 되었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재위 기간 업적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대외 정책


세종은 (明)과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종서(金宗瑞), 이천(李蕆)과 이징옥(李澄玉)에게 6진(鎭), 4군(郡)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李從茂)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 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 이종무의 실책: 정찰대 선발 때 제비뽑기를 선발 방법으로 채택해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의욕 없이 나간 정찰대 중 180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 말았다.


국방 정비

대마도 정벌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1420년 새로운 조선을 위한 유교적 정책 수립과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 집현전에서 1443년 세종은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학 및 음운학을 연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遼東)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날 수 있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이렇게 언어학 및 음운학을 연구한 끝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자신의 뜻을 자유로이 글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였고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이후 훈민정음은 한때 암클, 언문등으로 천대 받는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국인들이 매일 읽고 쓰는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모든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세종은 내각책임제의 원조격인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黃喜)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대의 또다른 정승은 맹사성(孟思誠)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와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과학의 발전


세종은 정인지, 정초(鄭招),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1442년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현대에 와서 재구성한 모형이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

 

1431년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2]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생애 말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임질(성병),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세종의 6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사후


1450년(문종 1)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諡號)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366)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367) 를 높이고 종(宗)368)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369)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中國)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恩寵)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370) 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371)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372) 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373) 을 누리고, 순희(純禧)374) 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375)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태백산사고본】【영인본】 6책 237면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해 있다.


세종 사후 정세


세종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세자이자 장남인 문종이 보위를 이어받은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장손인 단종이 12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문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궁궐에는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나 왕대비가 없는 상황에 문종이 유지를 남겼던 신하들에게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양대군등 왕족들의 세력이 팽창해 가며 정치적으로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단종의 재위 1년 만인 1453년에는 숙부이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세력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종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여 활약하였던 많은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국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단종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조정에서 제거되어 유배되고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 유배 후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뒤를 이어 금성대군 사건을 일으켜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과 그 세력들을 다시 한번 숙청한다.


결국 단종은 보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형식상의 선위를 하면서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이어 1456년에는 일명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 복위 사건에 연루된 6명과 이에 관련된 70여 명을 포함하여 조정에서 또 한 번 대숙청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주도하였던 세력의 공격으로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영월에 귀양을 가서 17세에 죽었다. 이어 금성대군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부터 선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불과 5년 만에 단종을 지지했던 왕족들과 세종의 치세에서 학자와 관료로써 세종이 남긴 많은 업적들에 큰 활약을 하고, 단종을 지지한 많은 관료들과 대거 숙청되었다.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