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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讀書)타는목마름을식혀준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 공식 스토리 " - 가로쉬 : 전쟁의 심장


정말 실망이다, 가로쉬.

 

아무리 애써봐도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그마르의 망치를 지나면서 “환영합니다, 대군주님!”이란 자랑스러운 환호성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분노의 관문 앞에 서서 아직도 꺼지지 않은 마법의 불길을 아무리 응시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자신에게 맞서는 어리석은 야수나 스컬지를 칼로 베어버려도 잠시뿐이었다. 얼굴에 튀는 뜨겁고 선명한 적의 피도 그 목소리를 지울 수 없었다. 다시 여행길에 올라 충성스러운 그의 늑대가 눈길에 앞발을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에는 그 말이 한마디씩 울려 퍼졌다. 

어쩌면 대족장이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스랄은 달라란으로부터 전쟁노래부족 요새까지 가로쉬와 동행하기로 했다. 노스렌드의 상황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가로쉬는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호드의 노스렌드 침공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스랄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가로쉬가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눈으로 확인하면 분명히 그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가로쉬는 자신의 늑대 말라크의 등을 때리며 사초 속을 헤쳐나갔다. 쿰우야 호수가 잿빛 아침 하늘을 거울처럼 잔잔히 반사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늦어도 해질 무렵이면 전쟁노래부족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로쉬는 내심 요새에 도착했을 때 스랄이 어떤 표정을 보일지 무척 궁금했다.

 불행히도 그들이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로쉬는 네루비안이 또다시 퇴마석 채석장에 쳐들어왔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졸네룹을 아무리 효과적으로 봉쇄해도, 곤충들은 서쪽으로 빠져나왔다. 놈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실려 북풍의 땅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돌격! 앞으로!” 가로쉬는 자기가 사령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함께 있던 코르크론 기수들에게 명령했다. 그는 차분함이 자신과 스랄의 차이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도 전에 말락을 전속력으로 끌어올리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차분함이 아니다. 바로 행동이다.

 전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쟁의 소리가 가로쉬의 귀에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장의 함성, 대포에서 나는 둔탁한 폭발음, 금속무기가 네루비안 각질을 쪼개는 특유의 소리. 도끼를 꺼내 드는 가로쉬의 심장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채석장 외곽을 순식간에 관통했고, 말락은 주인의 명령을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그들은 벽에 튀어나온 돌출부를 발판 삼아 아래로 뛰어 내려갔고, 짧은 함성과 함께 가로쉬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가로쉬 앞에 서 있는 네루비안은 그가 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가로쉬의 첫 번째 공격이 네루비안의 흉부를 갈랐고, 두 번째 공격은 몸통 앞쪽의 껍질을 송두리째 뜯어내 버렸다. 놈과 싸우던 전쟁노래부족 경비병은 어깨 위로 도끼를 치켜든 채 놀란 눈으로 가로쉬를 올려다보았다. 가로쉬가 씩 웃어 보였다.

 “헬스크림 님!” 경비병이 그에게 경례하며 소리쳤다. 그리고선 다른 이들을 향해 몸을 돌려 외쳤다. “대군주 헬스크림 님이 돌아오셨다!”

 가로쉬가 그에 응답하듯 도끼를 들어 올리며 그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놈들을 처치하라! 이 해충들에게 호드를 습격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라! 록타르 오가르!”

가로쉬의 합류로 병사들의 사기는 되살아났고, 그들은 모두 함께 “록타르 오가르”를 외치며 진격했다. 한편, 딱정벌레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채석장 바닥을 장악하고 있었고, 가로쉬는 놈과 맞서기 위해 말릭을 발로 찼다. 오크의 늑대들은 기수만큼이나 철저히 전투 훈련을 받았다. 말락이 네루비안의 발목을 깊숙이 깨물어 놈의 균형을 깨트리자 가로쉬가 늑대에서 뛰어내렸다. 탈것 위에서의 전투가 유리한 점도 많았지만 가로쉬는 양발을 땅에 딛고 싸우는 것을 더 좋아했다.

 네루비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가로쉬의 목을 겨냥해 앞다리를 뻗었다. 가로쉬는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도끼를 휘둘렀고, 잘려나간 네루비안의 관절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땅에 떨어졌다. 네루비안은 비틀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가로쉬는 춤을 추듯 냉혹한 은총으로 가득 찬 도끼를 휘두르며 그 뒤를 쫓았다. 혈관에는 피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가슴 속에는 전투의 열정이 타올랐다. 그는 죽음을 선사할 때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도 그 역설적인 증상을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괴물이 똑바로 서지 못하도록 말락이 다리를 괴롭히는 사이, 가로쉬가 놈의 흉부를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리치려는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빛이 번쩍였다. 껍질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가로쉬를 순간 어지럽게 만듦과 동시에 대족장 스랄의 등장을 알렸다. 네루비안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가로쉬는 자신감 있는 몸짓으로 도끼를 치켜들었고 최후의 일격을 가해 거대한 곤충의 머리를 둘로 갈랐다.

 가로쉬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남은 일은 전쟁노래부족 병사들이 채석장 곳곳에 남아 있는 네루비안을 깨끗이 처리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스랄이 둠해머를 치켜들었고 가로쉬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대기 시작했다. 대족장의 명령에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엄청난 격노의 바람이 몰아치며 가로쉬 목 뒤의 머리카락을 하늘로 솟구치게 했다. 스랄이 고함치며 마지막 남은 적들에게 눈 부신 번개 화살을 내리쳤고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옆으로 나자빠지며 몸을 피했다. 폭발이 끝나자 검게 그을린 갑각 파편들이 바위 위로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가로쉬는 말락을 곁으로 불러 팔로 목을 감쌌고, 병력을 헤아리며 승리의 기쁨에 도취했다. 짧은 전투였지만 만족스러웠다. 호드가 고대 네루비안 왕국 위에 요새를 구축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루비안의 공격은 점점 수그러들었고, 가로쉬는 결국 모든 공격이 완전히 중단될 것을 확신했다. 그의 군대는 방어를 거듭하며 점점 더 효율적으로 발전했고 방어선도 아직 견고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견고할 것이다.

 가로쉬는 경사로를 따라 전쟁노래부족 요새의 최전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대군주 라즈고르가 수액이 흘러내리는 검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얼굴에 난 땀을 닦으며 라즈고르가 그를 맞이하자 가로쉬가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돌연변이 곤충을 때려잡을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않은가.” 가로쉬의 대답에 라즈고르도 웃었다.

 “대족장 스랄 님께서 달라란에서부터 나와 동행하셨네. 노스렌드에 구축한 기지를 확인하려고 말이네.” 그가 말하는 도중 스랄이 가로쉬 뒤에서 어두운 통로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라즈고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대군주 헬스크림의 귀환을 환영하라!” 병사들이 환호하며 무기를 휘둘렀고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환영하라, 우리의 대족장! 듀로탄의 아들 스랄 님을!” 군중은 재빨리 몸을 틀어 경례했고 모두의 눈은 황송한 듯 스랄을 주시했다. 라즈고르도 한 발짝 앞으로 나와 경례했다.

 “전쟁노래부족 요새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족장님.” 스랄의 눈이 요새의 높은 석벽과 철재 보루, 그들이 방금 전투를 펼친 채석장을 훑은 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로쉬에게 향했다.

 “오그리마가 생각나는군, 인상적이오.”

 만족한 듯한 스랄의 대답에 가로쉬가 덧붙였다. “내부는 더욱 그렇습니다. 직접 보여 드리지요.”

 “실망할 일은 없길 바라오.” 스랄의 대답에 가로쉬는 이가 갈렸다.

 오그리마. 처음 오그리마를 봤을 때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가로쉬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칼바람 협곡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높이 솟구친 사암 벽 사이로 듀로타의 무자비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붉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고 뜨거운 열기에 아른거리는 수평선은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둥근 녹색 언덕으로 둘러싸인 나그란드와는 아주 다른 세상이었다.

 “저기! 보이는가?” 스랄이 탈것에서 내려 북쪽 수평선을 가리켰다. 가로쉬가 옆으로 와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봤다. 그들 뒤로 수행원들도 멈춰 서서 서성대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높은 관문과 나무로 만든 탑, 커다란 붉은색 지붕... 아니, 이건 분명히 눈이 장난을 치는 것이리라. 가로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그리마가 저렇게 거대하다니... 스랄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가로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가로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로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라다르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족장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인상적이군요. 보이는 것만큼이나 실제로도 거대하다면 말입니다.”

 가로쉬의 반응에 스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거요.”

 성문은 단순히 높기만 한 게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대족장을 알아본 병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다. 어깨를 쫙 펴고 정면을 응시하던 가로쉬는 갑자기 갈증이 났다. 당연히 먼지 때문이었다.

 몇 주 동안 함께한 여행길에서 스랄은 가로쉬가 오그리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가로쉬는 어떤 모습을 기대해야 할지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틀렸던 것이다. 아무리 많은 얘기를 들었어도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2,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고, 그 정면에는 나무와 암벽으로 그늘진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펼쳐져 있었다. 드레노어에 이 도시의 반만 되는 오크 정착지가 있었어도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그리마는 생기가 넘쳐났다. 광장에는 오크들이 넘쳐났다. 그가 여태껏 본 것보다 더 많은, 여태껏 살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오크가 그곳에 있었다. 가로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가로쉬가 아직 어렸을 때 부족은 호드를 결성했고 후에 1차 대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몇 달 동안 전투 준비에 몰입했다. 몇 년 뒤, 2차 대전쟁이 끝난 뒤에, 이번에는 얼라이언스가 오크의 고향을 침공했고, 가로쉬는 호드에 합류하여 아버지와 함께 명예롭게 싸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는 붉은 천연두에 걸려 걷기조차 어려워져서 열병과 부끄러움에 몸이 달아오른 채로 가라다르에 격리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제로스로 향했고 다시는 가라다르와 아들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노래부족의 후계자인 가로쉬 헬스크림에게는 부족을 이끌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호드는 그를 부족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마그하르(타락하지 않은 오크)였지만 동시에 인정받지 못한 오크였던 것이다.

 호드는 결국 몰락했다. 인간이 어둠의 문을 파괴하고 정복한 오크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면서 대전쟁은 막을 내렸다. 마그하르는 완벽히 홀로 남겨졌다. 사실 남겨진 오크가 더 있긴 했지만 그들은 병에 걸린 주민을 두려워하고 경멸하여 가라다르를 꺼리고 있었다. 전염병은 자연히 사라졌지만 공포와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크는 완전히 분열되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을 계속하는 종족이 되어버렸다. 결국 호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얼라이언스는 그들의 희망이 재가 되어 사라지고 생존조차 허황한 꿈으로 느껴질 때까지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

 하지만 여기 있는 호드는 생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번영하고 있었다. 광장은 오크로 넘쳐났다. 상인들은 할인된 가격의 물품 목록을 외치며 고객을 확보하려 들었다. 아이들은 가판대 사이를 뛰어다니며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가상의 전투를 펼쳤고 그런트가 거리를 순찰했다. 가로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스랄을 힐끗 쳐다봤다.

 “장관이지 않소?”

 스랄의 말에 가로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오, 가로쉬.” 스랄이 환하게 웃었다. “오그리마에 온 것을 환영하오!”

 전쟁노래부족 요새에서 그들은 성벽을 걸으며 탑 꼭대기에 올라보고 대장간과 무두질 공장을 둘러봤다. 대전당에 돌아왔을 때 스랄은 많은 시간을 들여 바닥에 깔린 엄청난 크기의 노스렌드 전술 지도를 분석했다. 섬세하게 식각된 가죽을 꿰어 만든 그 지도에는 노스렌드에 있는 아군과 적군의 모든 거점과 기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가로쉬는 스랄이 울두아르가 위치한 폭풍의 봉우리 북부 반도를 특히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순간 가로쉬의 기억이 달라란에서 열린 키린 토와의 짧은 회담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정말 실망이다. 가로쉬는 관절이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음왕관의 전선이 어딘가?” 스랄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은빛십자군이 점령 중인 남동쪽 지역입니다.” 가로쉬가 대답하자 스랄은 은빛십자군 점령지 바로 위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그림의 망치호가 여기로 보내졌소. 우리는 공중에서 얼음왕관의 방어벽을 공격할 것이오.” 가로쉬가 스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찰병들에 의하면 얼라이언스도 그것과 똑같은 계획이라고 했지요.”

 스랄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공격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스랄과 가로쉬가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대군주 바로크 사울팽이 봉인된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도착한 전갈입니다. 코름 블랙스카가 직접 기록한 내용이지요.”

 “트롬카, 바로크.” 스랄이 사울팽을 반기며 인사했다.

 “트롬카, 대족장님.”

 “우리는 달라란으로부터 아그마르의 망치를 거쳐 여기로 왔소.” 스랄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분노의 관문에서 경의를 표하고 왔소.”

 바로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드라노시 일은 유감이오.” 스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들은 그의 부족을 지키면서 명예롭게 죽었습니다.” 바로크가 약간은 흥분한 듯 빠르게 대답했다. “저희가 리치 왕을 처치하면 아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스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블랙스카의 보고서입니다.” 바로크가 두루마리로 주의를 돌렸다. “전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보시지요.”

 가로쉬는 오그리마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리를 걷고, 시장을 구경하는 일은 무척 흥미로웠고 마구간과 훈련실, 대장간과 상점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 중 가로쉬는 도시 곳곳 지붕 위에 걸려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호드의 상징인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깃발. 그 깃발 아래 있으면 가로쉬는 자기가 어디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호드를 섬겼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랬듯이.

 하지만 동족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어디를 가도 모두 그를 쳐다봤다. 그롬 헬스크림의 아들이 살아 있고 오그리마를 방문 중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가로쉬는 그게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린 꼬마 아이가 엄마한테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엄마, 저기 봐! 저 아저씨 진짜 이상하게 생겼어!”

 “쉿! 조용히 하렴!”

 “저 피부 좀 봐! 우리처럼 녹색이 아니야! 녹색 피부가 아닌 오크도 있어?”

 가로쉬가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꼬마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한 손가락을 입가에 물고 가로쉬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로쉬는 아이를 마주 봤고 그 와중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바로 눈을 피하며 아들의 손을 잡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가로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어느새 모여든 군중을 둘러보면서 더 할 얘기가 있는 이가 없는지 말 없이 그들을 압박했다. 그래, 내 피부는 녹색이 아니다. 갈색이다. 나는 마그하르다. 구경꾼들을 충분히 위협해서 겁을 주고 난 뒤에야 그는 만족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로쉬가 채 멀리 가기도 전에 앙상한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로쉬가 놀라서 재빨리 몸을 틀었다.

 “용서하게, 젊은이. 하지만 해줄 얘기가 있네.”

 늙은 오크가 눈앞에 서 있었다. 머리는 오래전에 은색으로 바랬지만, 아직 매듭이 풀리지는 않았다. 얼굴과 팔에 난 셀 수 없는 상처는 그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가로쉬가 그를 노려보았다.

 “할 말이 뭐요, 영감?”

 “그 꼬마 아이가 한 말이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녀석은 이해할 수 없는 게야.” 늙은 오크가 고개를 저었다.

 가로쉬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난 당신의 설명 따위엔 관심이 없소.” 말을 마친 가로쉬는 가던 길을 가려 몸을 돌렸다.

 “난 자네의 아버지 헬스크림과 함께 싸웠다네.” 늙은 전사의 말에 가로쉬가 멈춰 섰다. “샤트라스 습격부터 잿빛 골짜기 숲까지 난 그를 따랐지. 그의 바로 옆에서 만노로스의 피를 함께 마셨고 그의 희생으로 피의 저주를 다시 풀 수 있었지.

 우리 같은 이들에게 자네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걸세. 저주가 풀리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버린 것들과 파괴한 것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자네를 보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로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우리의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롬은 위대한 전사였네. 나는 드레노어와 그 너머까지 그를 믿고 따랐다네. 이제 전장에 뛰어들 나이는 지났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난 자네도 따를 걸세.”

 가로쉬는 완전히 넋이 나간 느낌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늙은 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랄이 아버지의 가까운 동료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랄도 그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둘은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기에 스랄은 가로쉬가 궁금해하는 모든 얘기를 해 줄 수 없었다. 단지 가로쉬가 너무 교만해서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의 위대한 영웅담을 듣고 싶었다. 안 좋은 이야기는 자라면서 이미 지겹게 들어왔다.

 “자네는 부족을 자랑스럽게 할 것이네, 헬스크림.” 늙은 오크가 말을 마치고 나서 마침내 돌아서서는 멀리 사라졌다. 가로쉬는 거리에 홀로 남겨진 채 머릿속을 맴도는 여러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그는 자기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가로쉬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는 것 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의 두 발이 그를 도시의 가장 동쪽 지역, 샘물이 솟아나는 명예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그는 물가에 앉아 폭포가 돌에 부딪혀 작은 호수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반복되는 물의 흐름과 절벽의 그늘이 공기를 식히면서 사막의 열기로부터 휴식처를 제공했다. 물보라가 피부를 적시는 느낌이 좋았다.

 피부. 가로쉬는 손 등을 돌려 얼룩진 붉은색 바위를 배경으로 자신의 짙은 갈색 피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랄의 오크들은 정녕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의 외모에 정녕 그런 의미가 있었던가?

 주위에서 물이 튀겨 가로쉬는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자 오크가 고기잡이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그녀의 피부는, 당연히 녹색이었다. 물가로 좀 더 가까이 자리를 옮기던 그녀의 한쪽 눈과 가로쉬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가로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재미있나 보죠?” 그녀의 그물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경멸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 앉아서 제가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꼴을 구경하니 참 재미있죠?”

가로쉬가 콧김을 내뿜었다. “난 당신이 뭘 하던 상관하지 않소. 낚시하건 말건, 물고기가 안 잡혀서 시장에서 사다 먹건.”

 “사다 먹는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었다. “당신이 사줄 건가요? 물론 당신한테는 별거 아니겠죠, 헬스크림! 그래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가로쉬도 그 말을 듣고 피식거렸다. “그러시겠지. 나는 오그리마의 유일한 마그하르니까. 네가 한쪽 눈마저 없었다면 아직 몰랐겠지만 말이야.”

 “아버지와 똑같이 거만하군요.” 그녀는 그물을 걷어 삼베 가방에 쑤셔 넣었다. “당신은 멍청이예요. 당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멍청이.”

 그녀의 말에 가로쉬의 혈관에서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돌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리 아버지는 너와 스랄의 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셨다. 너희는 피의 저주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해준 우리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애당초 저주에 걸리게 해 준 당신 아버지께 감사해야겠죠!” 그녀가 당돌하게 되받아쳤다. “그리고 난 대족장의 부족이 아니라고요! 우리 부모님께서 그랬듯 저 역시 호드의 딸이고 그 이상의 의무는 없어요!”

 그녀의 말에 가로쉬는 격노했다. “의무가 없다고? 대족장의 부족이 아니라고? 지금 여기 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만의 공간에서 모두 전멸할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필요한 게 전부 있는 이곳에서?”

 “하! 그럼 제가 하나 물어보죠, 헬스크림. 이 도시를 정말 다 둘러보긴 했나요? 그래요, 시장에는 물품이 넘쳐나죠. 그런데 다 어디서 온 물품들이죠? 듀로타에 농장은 어디 있죠?”

 가로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그리마 변두리에 농장이 몇 개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돼지만 키우고 있었고 곡물이나 과일은 재배하지 않았다.

 “그래요! 없어요! 모든 물품은 저 멀리서 가져온 거라고요.” 그물이 담긴 가방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면 사막에서 약탈한 거죠. 만일을 대비해서 말이죠!” 그녀가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얼라이언스가 매일 우리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어요. 이 붉은 바위 덩어리를 ‘영토’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죠! 바로 북쪽에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잿빛 골짜기 숲이 있죠. 우리가 거기에 정착했나요? 아니죠! 우리는 사막에 살고 있죠. 자, 이제 말해봐요, 헬스크림. 왜 위대한 대족장님께서, 부족을 그토록 아끼시는 대족장님께서, 저희를 이 황무지에 가둬두셨을까요? 북쪽으로 강을 건너기만 하면 훨씬 풍족한 땅이 있는데 말이죠. 그는 타락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아니면 둘 다겠죠. 그리고 당신하고 딱 잘 어울리고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닥쳐라, 반역자여!” 가로쉬가 고함치며 위협적으로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감히 대족장님을 모욕하다니! 반역자여, 닥치지 않으면 네 주둥이를 틀어막아 주겠다!”

 “한 번 그래 보시죠.“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맞설 태세였다.

 “안 돼! 크레나!” 처음 듣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로쉬가 돌아보자 또 다른 여자 오크가 그들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안대를 한 오크에게 외쳤다. “크레나! 입 닥치지 못하겠니!”

 크레나는 그녀를 노려보고 콧방귀를 뀌더니 가로쉬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난 갈래, 고르고나.”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더니 둘에게 아무 말도 않고 자리를 떴다. 가로쉬가 그녀를 쫓으려 했지만 고르고나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둬 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녀가 애원했다. “제 여동생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 애는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답니다.”

 “그래야겠지.” 가로쉬가 으르렁대자 고르고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로쉬의 팔에서 조심히 손을 떼었다.

 “저희는 2차 대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 애는 저희를 해방해주신 대족장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크레나는 대족장님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럼 당신은?” 가로쉬가 대답을 요구했다. 고르고나는 크레나가 지나간 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은 전쟁에 참여하셨어요. 부모님은 당신의 아버지와 같이 만노로스의 피를 마셨고 함께 저주에 걸리셨죠. 그리고 호드의 이름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죠. 무고한 이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면서…”

 가로쉬는 화가 났다. 그의 아버지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필요하다고 믿은 일을 했을 뿐이오! 당신은 지금 부모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인가?”

 “전 저희 부모님을 존경해요. 오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틀렸어요. 모든 오크가 믿던 것이 틀렸었죠. 저희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요. 대족장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죠. 하지만 크레나는 이해할 수 없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얘기요. 당신은 전쟁에서 싸우지도 않았잖소! 포로수용소에 갇힌 어린아이였다고 했잖소! 그 정도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 아니오? 왜 더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저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몸에 표식을 지니고 있죠.” 그녀는 녹색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여동생과 그를 제외한 오그리마의 모든 오크의 손이 그랬다. “저는 그들이 뿌린 씨를 거두고 있어요. 저희가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그 빚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건가?” 가로쉬가 되물었다. 그녀의 태도가 그를 화나게 했다. 그녀는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과연 누가 그 빚을 정의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저는 대족장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빚을 갚을 것입니다.”

 “스랄 님은 절대 그렇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을 걸세. 우리는 누구에게도 갚을 빚이 없다고.”

 고르고나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예상치 못한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당신은 누구에게도 갚을 빚이 없겠죠. 하지만 저희는 당신이 아니니까요.”

 “모욕적인 짓이오.” 스랄은 방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늘약탈자가 그런 일을 용인하다니 믿을 수 없소.”

 바로크는 블랙스카의 보고서가 펼쳐져 있는 탁자 곁에 앉아 있었다. 방 건너편에서 가로쉬가 얼라이언스의 파란색, 호드의 붉은색, 스컬지의 해골 무늬 나무 표식을 각각 몇 개씩 집어 들더니 모두 얼음왕관 성채 죽음의 관문 모드레타르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나서 목탄 막대로 지도에 커다란 X 표시를 그렸다. 보고서는 그 지역에 파괴된 싸움터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얼라이언스가 모드레타르를 점령하려 했지만, 호드 순찰대가 이를 눈치채고 후방에서 공격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전방의 스컬지와 후방의 호드에 둘러싸인 얼라이언스 부대는 피해가 막심했다. 하지만 호드도 마찬가지였고 스컬지 또한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관문은 계속해서 리치 왕의 통제하에 있었다.

 블랙스카의 병력은 얼라이언스 병사들이 전투를 시작할 때까지 신중히 기다렸다가 그들을 학살했다. 하늘약탈자의 보고서를 읽던 스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희생적인 용기로 얼라이언스가 주요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용기가 바로 진정한 호드의 모습이다!

 “희생적인 용기. 진정한 호드의 ‘용기’.” 스랄은 마치 그 단어들을 후려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관문은 스컬지가 계속해서 점령한다. 블랙스카가 원한 것이 바로 이거였소? 이게 우리에게 명예로운 일이냔 말이오!”

 가로쉬는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고 대신 지도에 올려진 나무 표식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바로크의 눈빛이 그의 뒤통수를 꿰뚫는 듯했고 스랄의 눈빛도 곧 그를 향할 것이었다. 얼라이언스가 모드레타르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다. 가로쉬는 적어도 그것만은 확신했다. 그는 계속해서 작은 나무 표식들을 응시했고 늦은 밤, 다른 사령관들이 모두 잠에 들었을 때, 블랙스카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그런 용기가 바로 진정한 호드의 모습이다!

 그는 급사를 불러 두루마리를 건네며 말했다. “오그림의 망치호에 있는 하늘약탈자 코름 블랙스카에게 편지를 전달하라. 그에게 지금 즉시 전쟁노래부족 요새로 돌아오라고 전하라. 나 대군주 헬스크림이 그를 만나보고자 한다.”

 * * *

 가로쉬는 고르고나가 호숫가에서 한 얘기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장 먼저 만노로스의 피를 마신 오크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항상 그 사실을 상기시켰기에 가로쉬는 한 시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롬은 결국 만노로스를 처치하고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 모두의 저주를 풀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피로 빚을 갚은 것이다. 그 누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가로쉬를 괴롭히는 것은 크레나가 한 얘기였다.

 나이트엘프가 잿빛 골짜기에서 목재 짐마차를 습격했을 때 그 얘기가 떠올랐다.

 타이라가드 요새의 병사들이 칼바위 언덕에서 강도질했을 때 그 얘기가 떠올랐다.

 바엘 모단의 드워프와 북부 전초기지의 인간들이 호드의 영토를 침범하고 떠나기를 거부했을 때 그 얘기가 떠올랐다.

 이런 일은 모두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보복 행위가 반복되고 있었고 다행히 많은 전초기지에서 적절한 방어가 이루어졌다. 가로쉬는 그곳으로 가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싸울 수 있었다.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도록 얼라이언스가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가라다르와 다르게 오그리마는 자신을 지켜낼 힘과 병력이 충분했다.

아마 충분했을 것이다. 가로쉬의 생각대로 오크들이 타렌 제분소에서 포세이큰을 도우려고 뒤엉켜 있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가로쉬는 그런 결정을 내린 스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수의 오크는 쿠엘탈라스로 보내졌다. 오그리마에서 엘프를 만나 본 가로쉬는 도대체 왜 호드가 그들과 상종해야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충성심이 얕아 보였다.

 그리고 트롤들. 가로쉬는 그들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오그리마 남쪽 땅에서 그들의 영토를 되찾는 일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병력이 투입되었다. 그런 상황이 몇 년 동안 계속됐다. 대체 어떤 종족이 의술사 하나도 혼자 처리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쥐꼬리만 한 섬 몇 개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크레나가 한 말이 가로쉬의 마음속을 점점 더 긁어댔다. 가로쉬의 조바심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무법항을 거쳐 톱니항으로부터 곡물 선적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오그리마를 삶의 터전으로 만든 몇몇 포세이큰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경고했다. 다시 시작되고 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가로쉬는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동지가 적으로 변하고, 생명체가 살아 있는 시체로 변했다. 망설임, 용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되었다. 이건 역병이었다. 이건 굴단과 같은 악랄한 존재만이 계획할 수 있는 사악한 계략이었다. 하지만 굴단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누군가 다른 인물이 이 잔학한 행위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로쉬는 그 인물이 과거 얼라이언스의 왕자였던 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너무 순진하고, 너무 나약하고, 너무 멍청해서 자기 최면에 걸려 사악한 존재로 변해버린 자였다. 그가 이제 그들에게 죽음을 몰고 오고 있었다.

 가로쉬의 도끼가 쉴 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오그리마를 방어했다. 그는 자기의 부족을 지켜낼 것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역병의 확산이 멈췄다. 마지막 남은 감염자들까지 모두 처단되었다. 하지만 가로쉬는 이게 끝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 끝이 아니었다. 그런 뻔뻔한 적을 상대할 방법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전쟁밖에 없었다. 그는 전쟁을 갈망했다. 군대를 이끌고 호드의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다. 그는 스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 곳곳으로부터 보고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역병은 우리를 황폐화했고, 날아다니는 성채에서 우리의 영토를 훼손시키려는 군대가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그대는 아직도 기다리고만 있는가, 대족장이여. 전쟁을 선포해야 할 시기에 조언을 구하고 있는가! 그대가 호드로 받아들인 이... 동맹군들까지도 여기에 모여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해 줄 말이 기다리라는 말뿐인가!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스랄. 그대는 지금 주저하고 있다.

 “막고라!”

 극에 달한 불만과 분노로부터 도전의 외침이 쏟아져 나왔다. 스랄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정보를 원했으며 얼라이언스의 여자로부터 의견을 듣고자 했다. 반역자 왕자를 탄생시킨 바로 그 종족의 여자로부터 말이다. 가로쉬는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헬스크림의 아들이여, 내게 도전하겠다는 건가? 난 이런 일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만...” 죽음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스랄이 말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것이오? 듀로탄의 아드님께서 비겁자셨던가?”

 그 말이 스랄의 주의를 끌었다. 그를 향해 돌아서는 스랄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가 가로쉬를 기쁘게 했다.

 “따라 들어오시오!” 스랄이 용맹의 투기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로쉬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그대가 조치를 취하게 해주리라.

 * * *

 되돌아보면 결투가 중단된 것이 가로쉬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할 바에는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스랄이 제정신을 되찾고 마침내 노스렌드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가로쉬는 물론 그 명령에 열정적으로 응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이 점령한 땅 위에 세운 성채의 전당에서, 코름 브랙스카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스랄은 노스렌드에 남았다. 가로쉬는 스랄이 남은 이유는 가로쉬가 어떻게 하늘약탈자를 처리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확신했다.

 대족장이여, 다시 한번 실망할 것 같은가?

 블랙스카가 쿵쿵대며 들어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대족장이 있음에도 그는 가로쉬에게 보고했다. “전쟁노래부족 요새로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대군주님. 부름을 받아 영광입니다.”

 가로쉬가 파괴된 싸움터에서 보내온 서한을 손에 들고 말했다. “여기 보면 자네의 순찰대가 얼라이언스가 스컬지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를 차치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고 적혀 있네.”

 블랙스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정말 멋지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가로쉬가 보고서를 들여다보더니 다시 블랙스카를 바라보고 말했다. “전혀.”

 블랙스카의 눈썹이 놀라움에 치켜 올라갔다.

 “전투를 기다리고 있는 적을 습격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다른 상대와 전투 중인 적을 뒤에서 습격했다고? 앞으론 또 무슨 짓을 할 계획인가?” 가로쉬가 대답을 요구했다. “적군의 야영지로 숨어 들어가서 물에 독을 탈 텐가? 아니면 사령관을 마법으로 지배해서 잠든 자기의 병사들을 학살하게 할 텐가? 포세이큰처럼 적진에 역병을 쏟아 부을 셈인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울 생각인가?”

 블랙스카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에게 전투는 명예로운 전투뿐이다, 블랙스카.” 가로쉬가 보고서를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더니 손안에 구겨버렸다. “이건 비겁자의 방식이다! 나는 내 군대에 비겁자를 두지 않을 것이다!”

 “대군주님, 제가 동족을 욕보였다면 직위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블랙스카가 더듬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비겁자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내 군대에 비겁자를 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비겁자가 아님을 증명하라, 블랙스카. 오그림의 망치*** 돌아가서 호드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부하들을 이끌라. 실패하면, 난 너의 직위가 아닌 창에 꽂힌 네 머리를 요구할 것이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가로쉬는 블래스카가 떠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전당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인상을 쓴 채로 방어탑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방어 상태를 확인한 가로쉬는 문제가 있는 부분과 그 문제의 책임자를 머릿속에 기록했다.

다시 성벽을 따라 걷던 그는 스랄과 마주쳤다. “대족장이여.”

스랄이 사려 깊은 눈으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가로쉬는 스랄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그대가 블랙스카를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오. 파괴된 싸움터에서 그의 병사들이 저지른 짓은 비양심적이었소. 하지만 블랙스카는 여전히 강력한 지휘관이라오. 그가 없다면 얼음왕관으로 진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소. 그대는 분명히 올바른 결정을 내렸소.”

가로쉬가 스랄을 밀치고 지나가며 대답했다. “이번이 블랙스카에게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는 수하에 협잡꾼이나 사기꾼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이오. 몇 주 전에 누군가 보랏빛 탑 위에서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나오. ‘진정한 대족장은 비겁자와 손을 잡지 않는다.’”

가로쉬는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천천히 뒤로 돌았다. 스랄이 자기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잠시 뒤에 그가 대답했다. “저는 대족장이 아닙니다.”

스랄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대군주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거요.” 스랄은 주위에 펼쳐진 요새와 서쪽의 잿빛 하늘, 광활한 툰드라 평원을 내다봤다. “여기서 그대가 이룩한 일은 결코 사소한 업적이 아니오, 가로쉬. 우리의 기지는 안전하고 얼음왕관의 전장이 가까워지고 있소. 자네는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병사들은 자네를 존경하오. 자부심을 품으시오.”

가로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이번 공격의 지휘관 선임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가로쉬”

가로쉬가 놀라서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가로쉬는 몸의 무게를 한쪽 발에서 다른 쪽으로 옮겼다. 스랄의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호드를 섬깁니다. 그리고 호드의 영광을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믿어 의심치 않소. 그리고 그대는 분명히 잘해낼 것이오.”

가로쉬는 다시 몸의 중심을 바꾸며 스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진홍색 호드 깃발이 바람에 남실거리고 있었다.

스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라이언스를 대하는 자네의 태도는 잘못되었소. 그들 없이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소.”

가로쉬가 재빨리 다시 스랄과 눈을 마주쳤다. “저의 의무는 호드를 섬기는 것입니다. 오직 호드만을.”

“알고 있소. 하지만 피를 보는 것이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란 말이오.”

“쳇!”

가로쉬가 뒤돌아 난간에 두 손을 대고 기댔다. 뒤에서 스랄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쉬는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봤다. 스랄은 얼라이언스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놈들은 가라다르에서 오크의 적들이 그랬듯이 결국 호드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대응할 방법은 싸우는 길밖에 없고 가장 먼저 인간을 몰아내야 한다. 오크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얼라이언스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없다. 가로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족은 절대로 다시는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호드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