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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讀書)타는목마름을식혀준다

고대 마케도니아 의 문관 장군 " 에우메네스 "

고대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의 장군이자 학자이다.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Thracian Chersonese, 지금의 터키 겔리볼루 반도)의 카르디아(Cardia) 출신이어서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Eumenes of Cardia)'라고도 불린다.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재위 BC 359~BC 336) 때부터 왕실의 비서로 활약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로스 3세(Aleksandros III,  재위 BC 336~BC 323)의 동방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기병 지휘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 각지의 장군들이 왕국의 후계권을 놓고 대립하자 제국통일파로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르가이 왕조(Argead dynasty)를 지원하며 안티고노스(Antigonus I Monophthalmos, BC 382~BC 301) 등과 대립하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Babylon)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은 뒤, 각지의 장군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여러 개의 총독령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Philippos III Arrhidaeus, 재위 BC 323~BC 317)와 유복자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Aegus, 재위 BC 323~BC 309)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각지의 장군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나누어 가지며 왕국의 후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이를 '디아도코이(Diadochoi)' 전쟁이라고 하는데, '디아도코이(Diadochoi)'는 '후계자'를 뜻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페르디카스(Perdiccas, BC 365?~BC 321)가 섭정으로 커다란 권력을 행사했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을 떠나면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섭정으로 임명했던 안티파트로스(Antipatros, BC 397?~BC 319)와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322년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의 지원을 받아 소아시아카파도키아(Cappadocia)와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를 점령해 이 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Craterus, BC 370?~BC 321)가 안티고노스(Antigonus I Monophthalmos, BC 382~BC 301), 셀레우코스(Seleucos I Nicator, BC 358?~BC 281),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I Soter, BC 367?~BC 283?) 등의 장군들과 연합하여 페르디카스와 대립하자, 에우메네스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크라테로스(Craterus), 네오프톨레모스(Neoptolemus, ?~BC 321) 등과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321년 에우메네스는 소아시아의 북서부 헬레스폰트(Hellespont, 지금의 터키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크라테로스와 네오프톨레모스의 부대를 궤멸시키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하던 페르디카스가 부하에게 살해되면서 에우메네스의 세력은 고립되었다.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이 아니었으며, 왕실의 비서로 문관 출신이어서 군대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페르디카스가 죽은 뒤 시리아의 트리파라디소스(Triparadisus)에서 열린 장군들의 회의에서 안티파트로스가 왕국의 섭정이 되었으며, 에우메네스의 처형이 결정되어 안티고노스를 총사령관으로 정벌군이 조직되었다. 에우메네스는 리카오니아(Lycaonia)의 산악요새인 노라(Nora)에 정벌군에 포위된 채 고립되었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자 폴리페르콘(Polyperchon, BC 394~BC 303)이 섭정이 되었는데,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Kassandros, BC 350?~BC 297)는 안티고노스 등과 연합하여 폴리페르콘에 맞섰다.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의 지원을 받아 포위를 벗어나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는 티그리스강(Tigris R.)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친위대였던 은방패부대(Argyraspids)를 중심으로 왕국의 군대를 정비했다. 그리고 기원전 317년부터 안티고노스(Antigonus)와 지금의 이란 북부의 고원 지대인 파라이타케네(Paraecene)와 가비에네(Gabiene) 등에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기원전 316년 가비에네(Gabiene)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는 페르시스(Persis, 지금의 이란 파르스) 총독이던 페우케스타스의 태만 때문에 후방에 남겨 두었던 병사의 가족들과 수송대를 잃는 패배를 당했다. 은방패부대의 지휘관 안티게네스(Antigenes, ?~BC 316)는 에우메네스를 넘기면 포로로 사로잡힌 가족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겠다는 꾐에 넘어가 에우메네스를 붙잡아 안티고노스에게 넘겼으며, 에우메네스는 살해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에도 늘 왕의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고 어전회의()의 형식으로 군사 회의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아르가이 왕조를 지지하며 왕국의 통일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로마 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코르네리우스(Cornelius Nepos, BC 100?~BC 25?)는 에우메네스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의 '최후의 수호자'라고 평하며,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장군들이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20?)도 <영웅전(Parallel Lives)>에 에우메네스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한편, 에우메네스는 왕실의 일지인 <궁정일지(Ephemerides)>를 편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일지는 알렉산드로스 3세 때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만, 몇몇 내용만 간접적으로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